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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lcome to California

미국에 살다 보니 긴장하게 되는 것 하나

by 이방인 씨 2013. 11. 20.

십 년 넘게 미국에서 살다 보니 한국에 있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민감해진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그게 뭘까요???

얼마전에 제가 가장 좋아하는 한국 프로그램 무한도전을 보다가 알게 됐답니다.
그 날 방송에서 자칭 패션 피플인 노홍철 씨가 밀라노 컬렉션에 서고 싶다는 원대하고도 어이없는  꿈을 밝혔는데, 뒷 줄에 앉아 있던 정준하 씨마저 야욕을(?) 드러내더라구요.
그 때 하하 씨가 정준하 씨가 밀라노 컬렉션에 서는 건 가당치도 않다는 듯 이런 말을 합니다.

 

ⓒ MBC 무한도전

 

여기서 "백인 뚱보 아저씨"라는 단어가 유머의 펀치 라인이죠.
어떤 사람을 말하는지, 무슨 의도인지 단번에 알 수 있고 들으면 웃음이 터집니다.
저도 웃음이 나더라구요.
하지만 웃고 나서 편치 않았습니다.

제가 미국에 살다 보니 예전과 다르게 생각하게 된 사안이 무엇인지 이제 아시겠나요?
미국만큼 '인종비하성' 언행에 엄격하고 예민한 나라가 없죠.
하하 씨의 이 발언도 한국에서는 그저 유머일 뿐이지만 같은 상황이 미국에서 발생했다면 아마 비난의 대상이 됐을 것 같습니다.
만약 미국 방송에서 "백인 뚱보 아저씨" "흑인 뚱보 아저씨" "아시안 뚱보 아저씨" "히스패닉 뚱보 아저씨" 이런 말을 했다간 인종비하라며 항의하는 사람들 때문에 발언자와 프로그램 제작진이 사과하는 사태가 발생했을 수도 있죠.
저도 수많은 인종들과 함께 살며, 인종비하성 발언으로 경을 치는 사람들을 많이 봤더니 긴장하게 된 것 같습니다.

사실 인구의 대부분이 한민족으로 이루어진 나라 한국에서는 인종차별이나 인종비하에 대한 인식이 미국처럼 깐깐하지 않잖아요.
한국 방송에서 중국인이나 동남아인, 혹은 흑인들을 개그나 유머에 사용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촌스러운 옷을 입고 중국인 관광객을 흉내낸다든지, "한국 돈 받아요~" 하며 동남아 현지인들 말투를 흉내낸다든지, 혹은 얼굴을 까맣게 칠하고 입술을 두껍게 그리고 뽀글머리 가발을 쓰고 흑인 흉내를 낸다든지 말이죠.
타인종/타민족의 특성을 유머의 소재로 삼는 것에 거부감이 없는 문화 때문일 텐데요.
웃을 때는 모르지만 막상 다른 나라에서 한국인을 유머 소재로 삼는다면... 퍽 기분 상하겠죠?

미국 코미디 쇼에서도 간혹 웃기려는 의욕이 앞선 코미디언들이나 진행자들이 인종을 이용한 유머를 구사하기도 합니다.
현장에서 즉각적인 웃음은 터지지만 나중에 비판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언젠가 미국 방송에서 한국인을 유머의 대상으로 삼은 것을 보고 얼굴이 빨개지다못해 폭발할 뻔한 적이 있는데 여러분도 보셨다면 무척이나 화가 나셨을 거예요.
미국 내에서 영향력이 큰 인종/민족일수록 항의가 거세서 조심하게 되니 '놀림감이 되지 않으려면 역시 힘이 있어야 하는구나' 하고 씁쓸해지기도 하죠.
미국에서 당하고 열 받았으니, 한국 방송에서 다른 인종을 희화화할 때 속이 시원해야 하는데 그 반대였습니다.
그다지 즐겁지 않더라구요.

저 역시 한국에서 나고 자라 그 문화를 알기 때문에 한국 방송인들이 인종차별이나 비하의 의도를 가지고 그러는 것이 아닌 줄 알고 있지만 굳이 "글로벌 시대"라는 세계적 추세를 강조할 필요도 없이, 한국에서 일하는 외국인들도 많아지고 한국을 방문하는 관광객들도 앞으로 더욱 늘어날 테니 인식의 변화가 필요하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여러분,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이 글은 무한도전이나 하하 씨를 비난/비판할 의도가 아님을 밝힙니다. 제목처럼 미국에 살다 보니 이런 사안에 긴장하게 됐다는 이야기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