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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ything & Everything

[유럽여행] 시칠리아 여행(대실패)기, 울지는 않으리라~

by 이방인 씨 2013. 10. 6.

제가 지금부터 들려드릴 이야기는 여행기가 아닙니다.

처절한 여행 실패기입니다.

앞으로 시칠리아를 방문할 계획이 있는 분이라면 그 어떤 여행기보다 이 글을 필히 참고하십시오.
이렇게만 안 하면 즐거운 여행을 하실 수 있습니다.

시칠리아, 어쩐지 노스탤지어 (간만에 문자 한 번 써 봅니다.)를 느끼게 하는 곳 아니겠습니까?
이탈리아의 남쪽 끝, 장화 발에 채이는 돌멩이 모양으로 생긴 섬 시칠리아는 일정이 빠듯한 배낭여행객들이 즐겨 찾는 곳은 아닙니다.


여행객들이 주로 찾는 로마, 피렌체, 베니스에서 이렇게나 멀리 떨어져 있는데다가 그 거리를 감수하고 이동할 만큼 큰 볼거리도 없거든요.
때문에 유럽여행 가이드북에도 시칠리아에 대한 정보가 별로 없을 정도인데 이방인 씨와 P 양은 왜 굳이 시칠리아까지 간 걸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마피아를 보고 싶었기 때문이예요!!

웃으시려는 분들, 마음껏 웃으세요.
지금의 저는 숨고 싶을 만큼 부끄럽지만 그 때의 저는 당당합니다!

 여자가 20대 초반이라면 한~창 알 파치노 좋아할 시기 아닙니까. (응?!)


알 파치노 같은 마피아를 한 번 보고 싶은 마음에 시칠리아에 무려 2박 3일이나 할애한 저희는 그렇게 유럽여행기에 또 하나의 거대한 오점을 남기고 말았습니다.

나폴리에서 야간열차를 타고 도착해서 맞은 시칠리아에서의 첫 아침부터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가이드북에 별다른 정보는 없었지만 역에 도착하면 분명 관광안내센터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시칠리아의 팔레르모 역에서 저희가 찾을 수 있었던 것은 관광안내라기보다는 매우 작은 일반안내창구와 민박집의 주소 뿐이었습니다.
여행 처음으로 현지인이 운영하는 민박을 이용하게 되어서 몹시 설레는 마음으로 물어 물어 찾아갔는데 이 길이 며칠 뒤 저희를 지옥으로 인도할 줄은 그 때는 미처 몰랐습니다.

 

찾아간 건물에는 이런 엘리베이터가 있었습니다.
이게 현관문이 아니라 나무로 된! 엘리베이터였습니다.
좋게 말하면 antique였고 나쁘게 말하면 '이걸 타면 살아서 도착할 수 있을까' 싶은 구식이었는데
나무로 된 문을 양쪽으로 활짝 열여젖힌 뒤 안에 타서 걸쇠를 내린 뒤
버튼을 누르면 올라가더군요.

 

여권을 맡기고 돈을 내고 체크인을 한 뒤 들어간 방은 의외로 넓고 퀸 사이즈 침대와 세면대, 그리고 전망을 볼 수 있는 베란다까지 갖추고 있었어요.
이게 웬 횡재인가 싶어 서둘러 시칠리아의 전망을 보기 위해 베란다로 나간 순간,

 

아이 참~

마운틴 뷰도 아니고 오션 뷰도 아니고
이게 바로 꽉 막힌 골목 뷰라는 거구나...

 

골목 풍경을 보셔서 알겠지만 시칠리아는 이탈리아에서 꽤 낙후된 지역이라고 합니다.
중심지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진데다가 남부지방 특유의 무더운 날씨 탓에 개발도 더디어서 마피아가 탄생할 수 있었던 알맞은 토양(?)이었다고 하는군요.

일단 짐을 내려놓고 시칠리아 시내와 해변 탐방에 나섰습니다.
으음... 감상을 물으신다면, 그 날 일기장에 10년 전에 제가 그린 그림이 남아 있기에 보여 드립니다.

 

 이건 시칠리아에 대한 저의 막연한 기대감을 담은 상상도예요.


그리고 그 다음이 직접 시칠리아를 구경한 뒤에 그린 실사도입니다.


작렬하는 태양에게 목숨을 구걸하지 않은 10년 전 저의 고결함을 볼 수 있군요.

 

훌렁훌렁 옷 벗어제끼고 물놀이를 즐기는 현지인들을 보며 바닷가를 거닐고 있는데 시칠리아의 꼬꼬마 남자애 하나가 와서 말을 걸더라구요.
자기가 바닷가에서 잡은 성게를 보여주며 각종 해산물이 들은 망태기를 자랑하기 시작했습니다.
한참을 자랑하더니 사진을 찍자해서 찍는데 아오~ 요 꼬꼬마 녀석 포즈 한 번 보세요.

 

이 녀석의 양쪽에 저와 P 양이 서 있는 거랍니다.
너무 자연스럽게 어깨에 손을 올리더라구요.
어려도 '나도 이탈리아 남자다!' 이거죠.

 

잠시 후 몰려든 이 녀석의 친구 하나와 아버지들까지 네 명의 이탈리아노가 그들이 잡은 해산물을 자랑하는 바람에 저희는 저 검은 망태기 안에 있던 여러가지를 봐야만 했어요.
그리고는 급피곤해져서 (왜일까...) 그냥 숙소로 돌아와 널부러져 잠이 들었답니다.

다음날 아침에도 역시 철저한 계획도 없이 아그리젠토(Agrigento)라는 곳으로 향했습니다.
아그리젠토는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고대 그리스 신전들이 모여있는 '신전의 계곡'으로 유명한 곳이거든요.
그 곳의 유일한 볼거리라 그랬는지 역 밖으로 나오자마자 Valley of Temples → 라는 이정표가 보입니다.
멍 때리는 P 양과 단세포 방인 씨 콤비는 그저 화살표가 가리키는 방향대로 걸으면 된다고 생각하고 걸었습니다.

1시간 40분을요.....
그 뙤약볕 아래서요.....

워낙 시골 도로라서 지나다니는 버스도 잘 없더라구요....

 

이정표는 단지 방향을 제시할 뿐, 걸어가면 금방 나온다는 표시가 아니라는 것을 약 2시간 걸은 후에야 깨달은, 고등교육을 받았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는 두 명의 여대생은 이제 빈사상태에 이르렀습니다.

(제가 여행 시작부터 계속 덥다는 말을 빠트리지 않고 쓰고 있는데요. 구글에서 '2003년 여름 유럽 폭염'을 검색하시면 지금도 "잇따른 지구촌 재앙" "2003년 여름 유럽 폭염 사망자 증가" 라는 기사를 찾으실 수 있답니다.)

정신줄 놓고 땅바닥에 그냥 누워있던 저는 그 와중에도 이런 잡다한 사진을 찍었습니다.

 이게 바로 저희가 걸었던 길이예요.
이런 곳에 버스가 자주 다닐 일이 없겠죠.
그저 이정표만 보고 끝도 없이 그 방향으로 나아갔답니다.

 

그리고 이건 제가 널부러져 있던 길바닥에서 발견한 도마뱀입니다.
평소였더라면 깜짝 놀라 소리라도 지르며 일어났겠지만
이 때는 그럴 기운도 없어서  "도...마..뱀..이..다... 아..이..고..." 하며 셔터만 살짝 눌렀죠.

 

화살표는 틀리는 법이 없어 저희는 마침내 멀리서 이런 광경을 볼 수 있었습니다.

마치 신기루처럼 나타난 신전입니다.
누구 신전인지도 몰랐어요.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죠.

 

신전의 계곡은 거대한 신전군이기 때문에 볼 것이 많지만 저는 이상하게도 그 날의 기억이 잘 나지 않아요.

윗 사진과 이 사진은 동일한 신전의 모습인데요.
보시는대로 비교적 보존이 잘된 이 건물은 콩코디아 여신의 신전입니다.

 

(Wikipedia.org)

이건 최고 여신 주노 (그리스의 헤라) 의 신전이구요.

 

(Wikipedia.org)

헤라클레스에게 바쳐진 신전은 이렇게 기둥들만이 남았습니다.

 

(Wikipedia.org)

지구를 어깨에 받치고 서 있다는 거신 아틀라스의 모습입니다.

 

고행길이라고 여겨졌을 정도로 힘들었지만 아시다시피 평소 고고학에 관심이 많았던 저는 이 날 참 좋은 구경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 방.법.이. 멍.청.했.던. 것. 뿐.이.지.요.

구경을 하고 다시 역으로 돌아오는 것이 태산 같은 걱정이었는데 다행히 아이스크림이나 사 먹으려고 들어간 길 옆 구멍가게의 주인 아주머니께서 역으로 가는 버스를 탈 수 있는 곳을 알려주셨어요.
그래서 P 양과 저는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시칠리아의 시골 길에 주저 앉아 하드를 쭉쭉 빨며 기다리던 끝에 버스를 타고 역으로 돌아와 다시 기차를 타고 숙소로 돌아올 수 있었답니다.
그리고는 전날과 마찬가지로 이미 초저녁에 쓰러져서 잠이 들었죠.

다음날 아침, 타오르미나 (Taormina)라는 곳에 갈 예정이었던 저희는 여행 중 가장 아찔한 사건을 겪게 되었습니다.
10시로 예정되어 있던 기차 시간을 맞추기 위해 체크아웃을 하려 했더니 민박집 주인 아주머니가 숙박료를 내라고 하시더라구요.
응? 숙박료라니요?


여러분은 이미 숙소에 도착한 날 저희가 여권을 맡기고 돈을 지불했다는 사실을 읽으셨을 겁니다.
그런데 숙박료를 또 내라니요?!

사연인 즉, 본래 이 민박집은 숙박료를 후불로 받는 대신 투숙객들의 여권을 보관하는 시스템이더라구요.
그런데 이 아주머니가 그 날 더위를 드시기라도 했는지 저희에게는 숙박료를 선불로 받으셨으면서 여권까지 가져가신 거예요.
그리고선 저희가 체크아웃을 한다고 했더니 숙박료를 내지 않았다고 여권을 주지 않는 겁니다!!

배낭여행 중 유럽에서, 그것도 마피아가 사는 남쪽 끝 섬 시칠리아에서! 여권을 저당잡히게 생긴 저희는 눈 앞이 깜깜해졌습니다.
분명히 선불로 50유로를 지불했다고 말해도 아주머니는 "우리는 원래 후불제인제 무슨 소리냐"며 듣지 않으시더라구요.
유스호스텔이 아니라 주먹구구식 경영을 하는 민박집이라 영수증 같은 것도 받았을 리가 없었습니다.
기차 시간은 점점 다가오고, 여권은 아주머니가 열쇠로 잠가두는 서랍 안에 숨겨져 있고, 억울하게 50유로를 또 낼 수도 없고 정말 황당해서 기가 쭉 빠지더라구요.
P 양은 아무말 없이 의자에 앉아서 주특기를 살려 멍~ 때리고 있고 저는 결단을 내려야만 했어요.
아주머니에게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CALL THE POLICE HERE AND NOW! 아주머니가 돈 받으신 걸 기억 못하는 것 뿐이라면 실수겠지만 일부러 이러는 거라면 외국인 여행객 상대로 사기치는 거니까 경찰을 불러 잘잘못을 가리죠."

제가 강하게 말하니까 시칠리아의 아주머니는 약간 놀라시는 듯 했어요.
그러자 마음 약한 P 양은 "어우 야~ 그러지 마~" 하고 말리더라구요.
이런 상황에서도 말 한마디 없이 넋 놓고 있는 P 양이 답답해서 제가 대꾸했죠.

"그럼 50유로 더 낼까, 아니면 여기 계속 잡혀 있을까? 네가 선택하는대로 하자."

... P 양은 다시 조신하게 멍 때리는 자세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저는 아주머니께 법대로 하는 게 좋겠다며 계속 경찰에 전화할 것을 요구했죠.
아주머니는 장부를 들여다보시고, 어딘가에 전화도 하시고, 한참을 생각하시더니 여권을 내주셨습니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여권을 받아들자마자 역으로 뛰었지만 역시 기차는 이미 떠난 뒤였죠.
다음 열차는 2시간 후에야 올 테고 갈아타는 기차도 계속 뒤로 밀린 저희의 일정이 꼬인 건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시칠리아, 여행을 시작할 때만 해도 노스탤지어와 동의어였던 그 이름은 이제 저희에게 짜증의 대명사가 되었답니다.
물론 그건 시칠리아의 잘못이 아니라 저희의 준비부족과 때맞춰 닥친 갖가지 불운의 합작품이었지만요.
시간이 지난 후 시칠리아를 떠올리면 항상 이런 느낌입니다.

 

꼬인 일정 탓에 기차를 타고 가서도 여행은 못하고 역에 앉아
멀리 보이는 바다만 흘깃거리고 있었어야 했던 타오르미나역입니다.
그 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분노가 타오르미나~

 

뚜껑 열리지 않고는 회상할 수 없는 저의 시칠리아 여행 실패기 어떻게 보셨나요?


하지만 저를 동정하지 마thㅔ요!

 

글 첫머리에 밝힌대로 이 글을 읽으신 분들이라면 실패없이 즐거운 여행을 하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여러분,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