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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ything & Everything

[유럽여행] 피렌체는 내게 아일랜드인 트라우마를 남겼다

by 이방인 씨 2013. 10. 9.

피렌체에서 맞는 아침, 아직 모든 것은 완벽한 그대로였습니다.
르네상스를 만끽한 어제, 세상은 눈부셨지요.

현재 시각 8:00 AM, 어제의 행복이 엄청난 반전의 예고였음을 깨닫기까지 앞으로 약 11시간.

호스텔에서 아침을 먹자마자 숨가쁘게 도착한 곳은 우피치 미술관입니다.
무려 2,500점의 회화를 소장하고 있는 우피치는 세계 3개 갤러리 중의 하나로 샤갈이 직접 자신의 자화상을 기증하러 왔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명성이 높은 곳이죠.

 

(lookingitaly.com)

미술관치고는 자칫 딱딱해 보이는 'ㄷ'자 형태의 건물은 본래 메디치가의 사무실로 지어졌습니다.
Uffizi는 영어의 Office에 해당하는 단어랍니다.

 

갤러리의 입구에는 입장하려는 사람들이 또아리 튼 뱀 마냥 꼬불꼬불 서 있는데 보통 성수기인 여름에는 평균 2시간을 기다려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매.사.에. 철.두.철.미.하.고. 빈.틈.없.는. 저.는. (목숨만 살려 주세요.) 어제 미리 입장 예약을 했다는 말씀!
땡볕에 줄 서 있는 사람들 사이로 안내원에게 다가가 예약티켓을 내밀자 다른 입구로 바로 들어가게 해 주었습니다.
3층 건물에 45개의 전시실이 있을 정도로 볼거리가 많은 갤러리이기 때문에 정신 놓지 말고 빠릿빠릿 구경하는 것만이 살 길입니다.
빠트릴 수 없는 몇 가지 작품만 여러분께 소개해 드릴게요.

 

(en.wikipedia.org)

'비너스의 탄생'입니다.

아마도 비너스를 주제로 그린 회화작품 중에서는 가장 많이 알려진 그림일 텐데요.
미의 여신 비너스가 바다의 거품에서 탄생하자 서풍의 신 제퓌로스가 바람을 불어
비너스를 해안가로 인도하는 장면입니다.

르네상스 시대에 군웅할거했던 수많은 천재 예술가 중에서도 산드로 보티첼리는
특히 여인을 아름답게 그리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후에 많은 중세 예술가들이 성모 마리아의 얼굴을 그릴 때 보티첼리의 비너스를 참고했다고 하죠.

이 그림은 평소에 많이 접해서 익숙하지만 실제로 봤더니 예상을 뛰어넘는 크기더라구요.
높이 1.72 미터 너비 2.78미터이니까 눈 앞의 비너스는 실물 크기와 비슷했습니다.

 

(en.wikipedia.org)

역시 보티첼리의 '프리마베라'입니다.
프리마베라는 이탈리아어로 '봄'이라는 뜻인데 이 그림은 메디치가의 귀공자가
사촌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주문했다고 합니다.

가운데는 역시 비너스이고 춤을 추고 있는 계절의 여신들과 꽃의 여신 플로라가 등장합니다.
신혼부부의 결혼생활이 봄처럼 화사하게 피기를 기원하는 그림인 거죠.

보티첼리는 마치 유영하는 듯한 인물들의 부드러운 움직임과 낭만적 스타일을 고수했는데
동시대에 활동했고 어느 정도 친분도 있었던 레오나드로 다 빈치는 이런 말을 했다고 전해집니다.

"산드로가 원근법만 제대로 쓸 줄 알았다면...!"

최초로 거의 완벽한 원근법을 회화에 도입한 다 빈치는 천재 과학자답게 
보티첼리의 비사실적 스타일을 좋아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동방박사의 예배 스케치'

그리고 이게 바로 원근법에 민감했다는 다 빈치의 스케치입니다.
원근과 소실점이 철저한 이 스케치를 보면 보티첼리에게 왜 그랬는지(?!) 알 수 있죠.

 

(en.wikipedia.org)

'우르비노의 비너스'

베네치아 화파의 대표화가인 티치아노의 작품입니다.
나체의 여인이 부끄러움도 모르고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고 해서
당시에도 상당히 파격적인 작품이라는 평을 들었다고 하는데요.
비너스의 모델이 된 이 대담한 여인은 고위층만 상대하는 창부였다는 설이 있습니다.

 

약 다섯 시간 쯤 우피치 갤러리에 머물렀던 저는 나오자마자 허기를 달래러 이탈리아 식당을 찾아갔습니다.

현재 시각 2:30 PM, 귀찮은 소동에 연루되기까지 앞으로 약 4시간 30분.

이탈리아에 왔으면 당연히 파스타를 먹어줘야죠!

 

해산물을 좋아하는 저는 토마토 소스 해물 스파게티를 주문했습니다.

 

맛은 뭐... 본토니까 기본은 하죠.
스파게티보다 뇌리에 강하게 남았던 것은 오히려 저 인데, 동글동글 폭신폭신 너무 맛있을 것 같죠?

거~업~나~  딱딱해요.
이 빵 덕분에 유럽인들은 강한 치아를 가지고 있다는 확신을 얻었습니다.


점심을 해결한 후에는 피렌체 시내를 걸으며 메디치가의 흔적들을 발견하고 다녔습니다.
유럽의 명망있는 가문은 모두 고유의 문장을 가지고 있는데 메디치가는 동그란 공 (혹은 열매)이 박힌 방패를 문장으로 삼았습니다.

 

 

피렌체 곳곳에 남아있는 오래된 건물들 중에 이런 문장이 붙어있는 곳은 
과거에 메디치가의 소유였던 거죠.

 

걷다보니 어느새 피렌체인들이 사랑하는 아르노 강가에 다다랐습니다.

 

이탈리아 토스카나 주의 가장 큰 지류인 아르노 강은 피렌체인들에게는 젖줄과도 같다고 합니다.
강물이 있는 곳곳에는 중세시대에 건축된 석조다리들이 여전히 제 역할을 하고 있더군요.

 

자, 이제 아르노강까지 봤으니 지체할 틈 없이 또 다른 미술관으로 달려가야 합니다.
아름다운 여인들의 눈부신 나신을 보고 충분히 자괴감을 느꼈으니 이제 조각미남의 나신을 볼 차례니까요.
다비드여, 기다려 주오~

현재 시각 4:00 PM, 유럽여행 불운의 방점을 찍을 때까지 앞으로 약 3시간.

우피치와 비교하면 썩 가 볼 만한 곳이라고 할 수 없는 아카데미아 미술관에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오로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는 이 남자 때문입니다.

 

골리앗을 대적하고 있는 순간의 다윗을 묘사한 조각이기 때문에 얼굴에 긴장과 비장함이 담겨 있죠.

 

 오른손에는 돌멩이를 왼손에는 무릿매를 들고 있습니다.
이제 골리앗이 조금만 더 까불면 이마로 돌이 날아가겠죠.

 

지난번에 헤라클레스에 19금 스티커를 붙였을 때 여러분들의 실망이 대단하셨기에
오늘은 다비드의 하얀 나신을 전체공개합니다.

 

높이가 4미터에 달하는 이 대작을 미켈란젤로는 고작 29세에 완성시켰습니다.
다비드상의 전신을 보면 서양인답지 않게(?) 머리가 커서 소위 말하는 신체비율이 좋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미켈란젤로의 의도였다는 전설인지 진실인지 모를 후일담이 있습니다.
원래 다비드는 어제 말했다시피 베키오 궁 앞의 높은 거치대 위에 전시될 예정이었는데 그러면 보는 사람은 적어도 6-7미터 아래에서 다비드의 얼굴을 올려다보게 됩니다.
미켈란젤로는 이 높이를 감안하여 다비드의 머리를 크게 만들어 밑에서 올려다봤을 때 다비드의 신체가 적절한 비례로 보이도록 했다고 하네요.

유럽여행에서 돌아와 가족들에게 사진을 보여주는데 다비드가 나왔습니다.
어머니는 신기해하시며 "이게 그 다비드구나..." 하셨는데 흥할 인간이 말없이 사진을 보고 있다가 한마디 하더군요.

훗~ 다비드 별 거 아닌데? 


무엇이 별 게 아니라는 것인지는 여러분이 사진을 보고 판단하시면 되겠지요.
하지만 다비드를 위해 한마디 하자면, 골리앗을 쓰러뜨릴 때 다윗은 "소년"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늦게 크는 애들도 있으니까요. (뭐가??)

조각미남을 감상하고 나니 이미 저녁 무렵, 저는 가벼운 식사거리를 사 들고 숙소로 발을 돌렸습니다.

현재 시각 5:50 PM, 이번엔 내 잘못이 아닌 삽질에 휘말리기까지 앞으로 약 1시간 10분.

숙소에 도착하니 저희가 체크인했던 2층의 6인실에는 그 전날 만났던 아일랜드에서 오신 아주머니가 더운 날씨 탓에 창문을 활짝 열여제낀 채 병맥주를 홀짝홀짝 마시고 계셨습니다.
저 역시 혼자였기 때문에 (P 양과 저는 취향이 꽤 달라서 합리적으로 여행 중간 중간 개별 일정을 많이 짰는데 이 날 P 양은 피렌체 근교의 Cinque Terre라고 하는 '다섯 마을'에 갔었습니다.) 아주머니와 말동무를 하며 저녁을 먹기 시작했어요.

여러분은 아일랜드인이라고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시나요?
술을 즐기고 열정적이며 터.프.해서 한국인과 비슷한 성질을 가졌다는 말, 들어보신 적 없나요?
이 아주머니가 딱 그러하시더군요.
기차 화통을 삶아드신 듯한 목소리에 입담은 어찌나 걸걸하신지 여자분이셨지만 뱃사람을 연상시켰답니다.
폭염을 견디지 못한 아주머니는 시원한 병맥주를 꿀꺽꿀꺽 계속 들이키시며 제게도 술을 권하셨는데 알콜분해효소가 부족한 저는 술을 입에 대지 않습니다.
하여 아주머니 혼자 취해가고 계시는 와중에 열어둔 창문 너머로 밖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옵니다.
호스텔 정원에 있는 테이블에 둘러앉은 미국인 배낭여행객 남성의 한 무리가 역시나 더위를 잊으려 캔맥주 파티를 벌이고 있더라구요.
창문 밖으로 그들을 흘낏 쳐다본 아주머니, 갑자기 미국인들을 흉보기 시작합니다.
(2003년에는 이라크 전쟁 때문에 유럽에 반미정서가 꽤 퍼져있었거든요. 또한 유럽에서 미국인 관광객들의 이미지가 그리 좋지 않다는 것도 많이 느꼈어요.)

미국인들은 멍청하고 시끄럽고 예의를 모르는 것들이라며 신랄하게 흉을 보기 시작하시기에 저는 아주머니가 평소에 미국인들을 좋아하지 않고, 지금 얼큰히 취한 상태라는 것을 알아챘습니다.

현재 시각 6:53 PM, 아일랜드인 트라우마가 생기기까지 앞으로 약 7분.

그런데 아주머니가 갑자기 창가로 걸어가시더니 밖을 내려다보며 이렇게 외치는게 아닙니까.


야, 이 %&*#×√∋⊥ 미국 XX들아~!
시끄럽게 굴지 말고 ∵∫≠×≫≪∇ 닥치지 못하겠냐?!!

 

   OMG...WTF


무릎까지 내려가버린 제 아래턱을 수습할 틈도 없이 아주머니는 속사포처럼 미국인들에게 육두문자를 날리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 쪽도 캔맥주 파티를 하며 취기가 오른 혈기 왕성한 20대 청년들이니 뜬금없이 날아든 욕설을 참을 리가 없었습니다.
같이 대응발포를 하더라구요.
저는 생애 최초로 아일랜드 네이티브 스피커와 USA 네이티브 스피커의 쌍욕 배틀을 라이브로 듣게 되었습니다.
이런 귀한 경험을 하다니... 역시 여행은 해 볼 만한 것입니다.
상대편은 다수의 남성이니 중과부적인데도 아주머니는 굴하는 기색없이 마시고 있던 맥주병을 흔들어 그들 쪽으로 붓기까지 하셨어요!
어느 정도 정신을 수습한 저는 이 취객들의 말싸움이 큰 소동으로 번지기 전에 아주머니를 진정시키려고 창가로 갔습니다.

현재 시각 아마도 7시 2분으로 추정, 마시다 만 맥주캔이 날아오기까지 앞으로

5

4

3

2

1

야, 이 삐- 삐-들아~ 어디다 캔을 던져?! 너지? 너 삐- 삐- XX 니가 던졌지?
너 한 번 삐-삐-삐삐- 죽어볼래? 아놔~ 이것들이
삐-삐- 삐삐삐- 삐삐삐삐삐삐삐삐삐삐--------------------


조준이 그다지 훌륭하지 못한 탓인지 아니면 실제로 맞출 마음은 없었기 때문인지 (거리가 가까웠던 것을 생각하면 아마 후자일 것 같습니다만) 창문 사이로 날아들지 못하고 떨어지는 맥주캔을 보며 이방인 씨는 저렇게 외치고 싶었으나 아쉽게도 맨.정.신.이었기 때문에 입 밖으로 나오지는 않더군요.
서둘러 아주머니를 침대에 앉히고 창문 밖으로 외마디를 던진 채 문을 닫았습니다.

"She's drunk and SO ARE YOU!  이 분이 취했는데 당신들도 마찬가지네요!"

휴우~ 이래서 술 안 마시는 사람은 술자리에 가는 게 싫다니까요.
사고는 술 마신 사람이 치고 뒷수습은 왜 맨날 재미도 못 본 멀쩡한 사람이 해야 되는겨...

아주머니가 잠잠해지시고 한숨 돌릴 무렵 P 양이 돌아왔습니다.
그녀가 방문했던 다섯 마을은 아주 평화로웠던 것 같습니다.
다음날 아침 아일랜드 아주머니에게 어제 그녀가 저지른 짓을 알려주었더니 반응이...

"와하하하하하하하~ 내가 그랬어? 미국놈들 맛 좀 제대로 봤겠구만~"

 
그 맛은 어쩐지 제 혀에서 느껴집니다만...


앞으로의 여행지에서는 왠만하면 그 누구의 술자리에도 동석하지 않는 것이 현명하겠다는 생각을 얼핏 하면서 이방인 씨는 베니스행 기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여러분, 오늘도 신나는 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