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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ything & Everything

[유럽여행] 로마의 오토바이맨, 너 잡히면 가만 안 둔다

by 이방인 씨 2013. 10. 2.

두근두근 유럽여행 둘째날 아침이 밝았습니다.
지금부터 여러분과 저는 막시무스가 두 팔 벌려 우리를 기다리는 곳, 콜로세움으로 갑니다!

콜로세움역에서 내려 찾아가야 한다는 것만 알고서 길치 + 방향치인 저는 조금은 불안한 마음으로 로마의 메트로를 탔습니다.
워낙 거대한 경기장이니까 눈에 보이는 방향으로 걸어가야겠거니 하고 출구를 나와 앞을 바라보니,

 

두둥~

과연... 콜로세움역이라더니
소름끼치도록 곧이곧대로인 역이름이로구나.

바로 이 곳에서

 

이런 사내와

 

이런 사내
살과 살을 맞대고 몸과 몸을 부딪혔다는 것...

ㅎㅎㅎ남자들이 레즈비언 포르노를 보는 이유가 이런 거였구나!

드디어 화성에서 왔다는 다른 종족인 남성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여행은 역시 깨달음을 주느니!

 

상상만 해도 입가에 경련이 올 정도로 미소가 지어지지만 실상 그 시대의 검투사들은 황제와 군중의 오락을 위해 잔인한 혈투를 벌이며 죽고 죽여야 했고, 많은 기독교인들 역시 콜로세움에서 순교했기 때문에 마냥 흐뭇해할 수 없는 곳이기도 하죠.

최대 5만명을 수용할 수 있었던 거대한 원형경기장이라고 많이 듣잖아요?
하지만 영화나 다큐멘터리에서만 보다가 실제로 보니 막연하게 기대했던 것보다는 작은 규모였어요.
둘레 한 바퀴를 걷는데 시간이 그리 많이 필요하지 않았답니다.

 

없어져버린 뒷편의 외벽을 제외하면
서기 72년에 지어진 건물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견고해 보였습니다.

 

분명 예상보다 작다고 생각하면서도 내부를 걸.어.서. 구경해야 하는 투어는 하지 않았습니다.
귀찮아서요....

 

그렇습니다.
저는 무려 열 살이나 어릴 때도 이런 캐릭터였던 것입니다.

 

콜로세움 바로 옆으로 고개를 돌리면 전 세계 모든 개선문의 모델이 된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개선문이 서 있습니다.

 

이것도 '대제'씩이나 되는 사람의 개선문치고는 매우 작아 보여요.
역시 현대의 스케일에 익숙해진 눈으로 보면 안되겠어요.

 

라고 생각한 것도 잠시, 저의 시건방진 실망을 책망이라도 하듯이 고대 로마의 중심 광장이었다는 '포로 로마노'는 가히 압도적이었답니다.

 

좋은 카메라가 없었던 저는 그 거대한 전경을 다 담을 수 없었지만
사진 가운데 나 있는 길로 걸어다니는 관광객들의 깨알같은 모습과 왼편의 거대한 기둥들을
비교하면 이 곳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죠?

고대 로마 시민들은 이 곳에서 만나 정치, 사회, 종교, 철학 등 모든 분야의 토론을 즐겼다고 하는데요.
그래서 '포로'(Foro)에서 온 영단어 포럼(Forum)이 '토론의 장'이라는 뜻이죠?

 

포로 로마노를 보고 나서는 영화 속 오드리 햅번이 기겁하며 놀랐던 '진실의 입'으로 달려갔습니다.

 

(tripadvisor.com)

이 앞에만 가면 아무리 냉철한 사람이라도 입에 손을 우겨넣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됩니다.

 

이 곳에는 입에 손을 넣고 사진 찍으려는 사람들이 워낙 많아서 한~참 줄을 서서 기다리며 다른 사람들의 사진 찍는 모습을 구경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어도 넉살 좋은 사람들은 비명까지 질러가며 호들갑스럽게 손이 물리는 연기를 잘 하더라구요.
그런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는 잔재미는 있지만 진실의 입 자체는 별 거 없습니다.
하기야 애초부터 이건 진실과 거짓을 판결해 주는 신통방통한 입이 아니라 고대 로마의 하수구였다니까요.
물이 나오는 하수구답게 표면의 조각은 대양의 신 오케아노스의 얼굴이라고 합니다.
하수구조차 이렇게 아름답게 꾸몄던 걸 보면 고대 로마가 얼마나 화려한 도시였을지 짐작하고도 남죠?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었던 진실의 입보다 우연히 그 근처에서 찾은 아담한 신전이 더 마음에 들었습니다.

 

부엌의 여신 '베스타'의 신전이라고 하는데요.
제 사진 실력으로는 표현이 안 됐지만 맑은 하늘 아래 하~얀 신전과 하~얀 꽃덤불이 참 예뻤어요.

 

로마에는 볼 것이 너무 많아 시간이 부족한 배낭여행객은 낭만을 즐길 여유도 없이 바쁩니다, 바빠요~
이번에는 오드리 햅번이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내려오던 스페인 계단으로 향했습니다.

 

이런 장면을 연출하길 기대하며 이 곳에 가는 분들은 100% 실망하게 됩니다.
이 영화 때문에 이 곳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계단을 더럽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그랬는지
스페인 계단 및 광장에서는 음식물 섭취가 법으로 금지되어 있거든요.

 

영화처럼 젤라또를 먹지는 못 했지만 저는 이 곳을 찾아가다가 현실로 받아들일 수 없는 신비한 체험을 하게 됩니다.

헉얼핏 봐도 한 100여 명은 될 것 같은 군중이 공중부양을 하고 있는 것을 목격한 것입니다!

여러분도 믿을 수 없으시죠?
제 얘기를 잘 들어 보세요.
지도를 들고 헤매이며 걸어서 찾아갔기 때문에 광장 앞 쪽으로 나 있는 양 쪽이 막힌 좁은 오르막 골목길을 통해 도달했는데...

 

높은 건물 사이에 갇힌 좁은 골목길이었기 때문에 길 양쪽과 아래쪽이 모두 깜깜하다가
갑자기 햇빛이 쏟아져 들어와 눈이 부신 상태로 앞을 봤더니...

계단은 안 보이고 계단에 앉아있던 사람들의 몸만 둥둥 떠 있는 것처럼 보이더라구요.
잠시 헛것을 본 듯한 착각에 빠졌던, 매우 재밌지만 쓰잘데없는 잡.경.험.이었습니다.

 

금지된 젤라또를 먹고 있으면 어디선가 그레고리 펙이 근사한 양복을 입고 나타나 줄 것만 같은 가당치도 않은 아쉬움을 뒤로 하고 로마의 또 하나의 상징인 트레비 분수로 발을 옮깁니다.

 

트레비 분수야말로 명불허전이더군요.
나보나 광장, 판테온, 포롤로 광장, 기타 등등 이 날도 셀 수 없이 많은 곳을 갔었지만
트레비 분수는 낭만 그 자체였어요.
낮에도 한 번, 밤에도 한 번 가서 오래도록 보고 있었을 정도로요.

트레비 분수에 가면 당연히 동전을 던져야죠?
오른손에 동전을 쥐고 뒤로 돌아 왼쪽 어깨너머로 던지며 소원을 빌어야 한다는데요.

첫번째 동전은, 로마에 다시 올 수 있기를 빌고
두번째는 연인을 만나게 해 달라고 빌고
마지막 동전은, 연인과 헤어지거나 이혼을 하고 싶을 때 던지는 거래요.

저는 딱 한 개만 던졌는데 아직까지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제일 싼 동전을 던져서 그랬나 봐요...

 

헉헉헉~ 아침부터 부지런히 돌아다닌 저를 따라오시느라 여러분도 숨가쁘시죠?
로마가 이렇더라구요.
발길이 가는 곳, 눈에 보이는 것 모두가 명소고 유적이라 나중에는 뭘 봐도 감흥이 일지 않을 정도였어요.
여정의 절반 정도를 생략했음에도 포스트가 이렇게 길어졌으니 말입니다.

 

이건 그저 어느 길가에서 본 것인데도 왠지 로.마.니.까. 그럴듯하지 않아요?
실상은 아마, 경주 유적지에 가면 발에 채이는 기와조각 같은 것일지도요...

 

로마에 차고 넘쳤던 것은 단지 고대의 흔적들만은 아니었습니다.
끈적~끈적~한 남정네들도 믿기 힘들 정도로 많더군요.
이탈리아를 여행해 본 분이나 이야기를 전해들은 분이라면 익히 아실 법한, '눈에 보이는 XX염색체에게는 무조건 추파를 던지고 본다'는 사내들 말입니다.
얼마나 많냐면요...
저는 배낭여행 중 이탈리아에서 10일 보냈는데 아마 그 열흘 동안 제 평생 분량의 추파를 다 받았다고 할까요?
이탈리아 남자들 정말 징~하더라구요.
이 대목에서 오해하실까 봐 확실히 밝혀두지만, 저는 완.전.평.범.녀.입니다.
한 번 보고 지나가면 5초 후 잊어버리고 다시는 기억 안 나는 그런 외모를 가지고 있죠.
그런데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는지 이탈리아 남자에게 직접 물어 보았습니다.

 

이방인 씨: 이 나라 남자들은 대체 왜 이렇게 지나가는 여자만 보면 소란을 못 피워 안달인 거예요?

이탈리아노: 하하하 Miss, 이탈리아에선 그게 '예의'랍니다. 지나가는 여자에게 추파를 던지지 않으면 그게 무례한 거라구요. 여자에겐 언제 어디서든 남자의 관심과 눈길이 칭찬이 되는 법이니까요.

 

모든 이탈리아 남자가 이렇게 생각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여행 중에 우연히 만난 그는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말대로 대부분의 추파는 그저 인사 혹은 매너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남자들은 눈이 마주치면 '어디 가서 커피 한 잔?' 이라는 흔해빠진 멘트를 던지긴 했지만 실제로 곤란하게 군다든가 끝까지 따라온다 하는 일은 별로 없더라구요.
정말 미녀라면 사건의 전개가 다르겠지만요.

그런데 '습관성 매너'라는 것에도 성의가 있기 마련 아닙니까?
아무리 그냥 지나가는 인사치레라 할지라도 어느 정도 설득력 있는 연기는 중요하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제가 이 날 오후 로마에서 마주친 어떤 남자는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추파를 던진 대부분의 남자들은 싱긋 웃으면서 말을 걸었다가 저도 같이 웃으며 No, thank you. Bye~ 하면 또 싱긋 웃으면서 손을 흔들며 가는 성의를 보였는데 이 남자는 아니, 이 놈은!
제가 길을 걸어가고 있는데 반대쪽에서 오토바이를 슬슬 타고 오면서 한마디 하더라구요.

"아가씨, 에스프레소 한 잔?"

스쳐 지나가는 예의일 뿐이라고 해도 일단 자기가 그렇게 물었으면 YES이든 NO든 최소한 대답은 듣고 가야하는 거 아닙니까?!
이 남자는 그냥 제 할 말만 하고 그대로 오토바이를 몰아 씽~ 지나가버리더라구요. 고고

 

아놔... 이 좌~아~식~
내가 아무리 '예의용'에 지나지 않는다 해도 그 따위로 무성의하게 한단 말이지?!

 

다른 남자는 몰라도 너만은 내가 따.라.가.서. 잡.는.다.
위궤양에 걸릴 때까지 죽자고 에스프레소 사발식 하고 말거야.

한 사발 더 부으라~


원래 커피는 써서 입에 대지도 않지만 이 날 만큼은 몹시도 분개했던 방인 씨랍니다.

여러분이 기대했던 오토바이맨과의 로맨스가 아니라서 이걸 어쩝니까...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드리며 물러갑니다.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