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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lcome to California

미국와서 처음 사귄 친구, 알고 보니 나도 모르던 친척!

by 이방인 씨 2013. 9. 15.

여러분이 이불 속에서 아직 꿈틀거리고 있는 이 일요일 아침, 잠시 시간을 14년 전으로 되돌려 볼까요?
미국 땅에 떨어지고 열흘이 지나자마자 등교를 시작한 제게 당연히 친구란 없었습니다.
1500명이 다니는 학교에 한국인은 새로 등장한 저를 포함해 6명, 그나마 듣는 클래스도 저마다 달라서 자주 얼굴을 볼 수도 없는 상황이었죠.
이대로 고고한 전학생 외톨이가 되느냐 아니면 빨리 미국 친구를 만드느냐...
제 운명은 교묘하게도 그 두 선택지를 비껴갔답니다.

 

미국에서 만난 최초의 친구는 중국인이었거든요.

 

샌프란시스코의 사정을 잘 아는 분이라면 그리 놀랄 일은 아닐 겁니다.
캘리포니아 절경의 상징이 된 도시 SF에는 미국에서 가장 역사가 오랜 차이나 타운이 있습니다.
중국인들은 이 도시 전체 인구의 20%를 차지하고 있는데, 백인 다음으로 높은 비율이죠.
아시안의 파워가 비교적 높은 도시이기도 하지만 역설적으로 비중국계 아시안들에게는 조금 곤란한 곳이기도 합니다.
거리에서 만나는 중국인이 아무렇지도 않게 중국어로 말을 걸어오는 일이 비일비재하거든요.
덕분에 '워쓰 한궈런'이라는 말은 우물우물 밥을 먹으면서도 할 수 있게 됐지만요.

 

자, 이제 배경설명도 했으니 다시 이야기에 집중해 봅시다.
한국에서 영어를 배우긴 했지만 상하좌우전후에서 쏟아지는 Native English의 공격에 정신을 못 차리던 저는 '아, 생각보다 쉽지 않겠어...'하며 약간 의기소침하고 있었죠.
교실에서 만나는 학생들하고는 "굿 모닝? 하우 아 유?" 정도는 하고 지냈지만 친구라고 할 만한 사이는 아니었는데 어느 날은 옆자리에 중국계 미국인 여자 아이가 앉았습니다.
이 아이가 가져온 노트 위에 중국어가 몇 마디 적혀 있었는데 제가 아는 한자가 있더라구요.
바로 이거요!

 

 

꽤 많은 경우에 뇌보다 먼저 행동하는 제 입이 가만 있지를 못하고 단박에 아는 척을 했습니다.

 

"That means water, huh?"

 

"Yeah, 어떻게 알았어?"

 

"한국에서 배웠어. 水 山 金 뭐 이런 것들..."

 

"푸하하하하하. 또 뭐 아는 거 없어?"

 

"내 이름, 한자로 쓸 수 있어."

 

"여기다 한 번 써 봐."

 

한국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라면 대부분 자신의 이름을 한자로 쓸 줄 알죠?
제가 또박또박 제 이름 석 자를 한자로 적고 났을 때, 어느 새 제 두 손이 살포시 포개져서 그 친구의 두 손에 꼭 잡혀 있는 것을 눈치챘습니다.

 

응? 난 이 아이의 손을 잡은 기억이 없는데... 그렇다면 분명 이 아이가 내 손을 잡은 것이렸다.
하지만 왜??

 

Oh my God~~~ WE ARE FAMILY!!

제 손을 끌어다 잡은 그 아이가 바로 저렇게 외쳤답니다.

 

 

응? 패밀리? 이게 내가 아는 영어 Family가 맞는 건가? 그런데 왜 우리가 패밀리일까?


 

여기서 여러분은 또 한 번의 배경설명을 듣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한국에는 약 250개의 성씨가 있는데 그 중 130개 정도가 중국에서 (물론 아주 옛날부터) 귀화한 성씨입니다.
그리고 이제 눈치채셨겠지만 제 성씨가 그 130여 개 중의 하나로 성씨 앞에 붙는 본관 역시 중국의 지명이죠.
그런데 마침 그 중국인 친구의 성이 저와 똑~같았던 겁니다.

 

 


한국에서도 같은 성씨는 친척들 밖에 만난 적이 없는데 진짜 중국인 동성동본을 만나다니....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 스타!!!!
고려시대에 귀화했다고 기록되어 있는 우리 집안의 조상님, 보고 계십니까?

 

 

여러분들 혹시 중국인들의 인간관계에 대한 철학을 들어보신 적이 있나요?

 

사해형제 (四海兄弟): '천하의 뭇사람이 모두 형제'라는 뜻으로 논어에 나오는 말이라고 하죠.

천하의 뭇사람이 모두 형제인 마당에, 어느 날 갑자기 동성동본 한국인 친구가 뚝 떨어진 거예요.
그냥 재밌는 우연이라 웃어 넘길 수도 있지만 그 아이는 저와 친구가 되어 주었습니다.
학교에서 같은 중국계 친구들과 마주치면 농담으로 '이 애는 내가 모르고 있던 한국의 친척이야.' 하며 소개해 주고 학교 생활에 대한 정보도 주고 학교에서 공짜 아침을 먹는 방법도 가르쳐 주고 말이죠.
그 친구 덕분에 제가 수월히 학교 생활에 적응한 것은 말할 것도 없구요.

잊을 수 없는 그 아이, 리엔이 저보다 먼저 졸업을 하고 저는 또 다른 도시로 이사를 오고 하면서 연락이 끊어지게 되었고 벌써 십 여년이 흘렀네요.

 

가끔 생각나고, 늘 고맙습니다.

 

우리가 동성동본이었던 것은 기막힌 우연이었지만 그것은 하나의 계기였을 뿐, 리엔이 제게 다정했던 것은 그 때문만은 아니었겠지요.
그녀는 단지 좋은 사람이었던 겁니다.
사람을 상냥하게 대할 줄 아는 사람이요.
미국인이든 한국인이든 중국인이든 국적이 어디든 그냥 좋은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여러분도 좋은 사람들과 좋은 하루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