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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직장생활

미국 직장의 숨막히는 눈치 싸움

by 이방인 씨 2020. 3. 13.

러분 3월 13일이 무슨 날인지 아십니까?


  13일의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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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이 날은 바로 저희 보스의 생일입니다.


누구에게나 1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생일이 딱히 거창할 일은 없지만, 이 날이 제게 크게 다가오는 이유는 바로 동료들과의 숨막히는 눈치싸움이 벌어지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일전에 미국 직장 상사들은 부하직원에게 돈을 쓰지 않는다는 글 (2019/11/09 - [미국 직장생활] - 미국 직장 상사에게 밥 얻어먹기란 하늘의 별따기)을 쓴 적이 있는데, 돈에 현실적이고 민감한 미국인답게 부하직원들도 상사들의 생일이나 명절 등을 챙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일반론이고, 성향에 따라 상사에게 선물을 하는 직원들도 있는데, 바로 이 때문에 예기치 않은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보스의 생일을 챙기지 않으려면, 두 함께 한마음 한뜻으로 챙기지 않아야 하는데 꼬~옥~ 선물을 준비하는 직원들이 있단 말이죠. 이론적으로야 뭐... 누가 어떤 선물을 하던간에 나머지 직원들은 눈치 볼 일 없어야 하고, 보스도 영향을 받지 않아야겠지만,


인간이 괜히 인간입니까?
감정이 휩쓸리니 인간이지요.


나는 보스의 생일에 "축하해요~" 한마디 하고 넘어갔는데 다른 직원이 선물임이 분명한 포장된 무언가를 가지고 오면 괜히 신경이 쓰일 수 밖에 없지요. 그렇게 누군가의 선물을 목격한 다른 직원들 중에 또 어느 누군가가 선물을 가져오고, 그러다 보면 어느 새 직원들은 두 부류로 나뉘게 됩니다.


보스의 생일에 선물을 한 그룹선물을 하지 않은 그룹으로 말이죠.


그리고 이 때 선물을 하지 않은 그룹에 속한 직원들 중에는 속으로 불안한 사람들도 있기 마련입니다. 혹시나 보스가 선물을 준 직원을 더 마음에 들어하면 어쩌나 하고 말이죠.


제가 전에 다니던 직장에서는 모든 팀원과 보스의 생일에 간식 파티를 했기 때문에 공평한 축하 속에 아무도 눈치 보지 않고 넘어갈 수 있었는데, 현재 다니는 회사에서는 여왕벌 보스 밑의 직원들이 치열하고도 치밀한 눈치 싸움 속에 개별적으로 보스의 생일을 챙기는 문화가 있더라구요. 그리고 불행히도 저희 보스는 편애를 감추지 못하는 (혹은 감추지 않는) 분이십니다. 마음에 드는 직원에게는 한없이 너그러운 반면, 선호하지 않는 직원에게는 눈에 띄게 엄격하신 분이죠. 상황이 이렇다보니 딱히 처세에 관심이 없는 직원이라도 평화로운 직장생활을 위해 보스의 눈에 들기 위해 노력할 수 밖에 없답니다.


미국에서는 상사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요령껏 사회생활하는 것을 "managing up"이라고 하는데, 타고나기를 managing up 잘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하기 싫어도 회사생활 스트레스를 줄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managing up하는 직원들도 있습니다. 저 역시 사회 초년생 시절 보스와의 큰 불화로 2년간 지옥을 경험한 뒤, 그 후로는 적당히 managing up하는 법을 배웠답니다. 


어른이 된다는 건 싫어도 해야하는 일이 많아지는 걸 의미한다고 누가 그랬던가요? 그런 의미에서 보면, 저는 다 컸답니다. -.-^ 


사 가기 싫어
보고서 쓰기 싫어

보스한테 굽히기 싫어

날 엿먹인 싫어하는 직원에게 웃는 낯으로 인사하기 싫어
샐러드 먹기 싫어

초콜렛 먹고 이 닦기 싫어

설거지 하기 싫어

내일 출근을 위해 일찍 자기 싫어


하지만 해야만 해


 난 으.른.이니까 



어쨌든 "으른의 사정"으로 저는 3월 13일 때문에 골치가 아팠답니다. 도대체 어찌해야 한단 말입니까. 솔직히 아무것도 안 하고 넘어가고 싶지만 저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보스의 최애 동료 M와 K는 집에서 손수 만든 선물 바구니를, 부유한 동료 S는 뭔가 값나가고 좋은 것을, 남자 동료 P는 보스가 좋아하는 화분을 줄 것이라는 사실을요. 동료 T는 아무것도 안 할 것 같지만 그녀는 이미... 보스의 내놓은 자식이라는 사실을 사무실내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그럼 저는 어떡해야 할까요... 이런 저런 고민을 하다 저란 녀석은 언제나처럼 안일한 결론에 도달하였습니다. 라 모르겠다. 축하할 때는 모름지기 꽃이렷다!


그렇습니다.
저는 그냥 내일 아침 출근길에 꽃다발이나 사올랍니다.



되는대로 살다 얻어진 어중간한 내 인생, 앞으로도 계속 어중간할 예정인가 봅니다...


여러분 신나는 하루, 유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