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미국 직장생활

미국인 직장동료왈, "너는 참 편하게 회사 다닌다."

난 주에 직장 동료들 대여섯명과 함께 점심식사를 하는데 그 중 한 명이 저한테 이런 말을 하지 뭐예요.

"방인이 너는 진짜 직장 편하게 다닌다. 보스가 너한텐 친절하잖아."

음... 일단 이 말에는 거짓과 진실이 섞여 있습니다.

직장 편하게 다닌다 - 거짓
보스가 너한텐 친절하잖아 - 액면으로는 
진실

세상 모든 직장인들과 마찬가지로 저 역시 가슴에 사직서 한 장 쯤은 품고 회사에 다닙니다. 직장 스트레스로 밤에 악몽을 꾼 적도 두어번 있구요. 그런데 왜 미국 동료들 눈에는 제가 직장 편하게 다니는 것처럼 보였을까요?

첫번째 이유. 보스가 제게 ... 친절하긴 합니다.

맞습니다. 보스는 이 날 제가 함께 점심식사를 했던 미국인 동료들보다 제게 비교적 더 친절하긴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동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편애"는 아닙니다. 보스에게는 보스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습니다.

연장자 및 상급자 예우가 몸에 밴 저는 업무에 해가 되는 사안이 아니라면 .. 보스의 의견을 존중합니다. 어차피 큰 줄기의 결정은 보스가 하기에 의견충돌이 생길 수 있는 부분은 기껏해야 취향이나 스타일 차이에서 비롯됩니다. 요컨대 목적지 결정은 이미 보스가 했지만 그 목적지에 가는 여러가지 루트중 어느 것을 고르느냐의 문제란 것이죠. 보스가 원하는 루트 A와 제가 선택한 루트 B가 다르더라도 도착예정시간에 딱히 큰 차이가 없다다면, 저는 그냥 보스가 원하는 길로 가게 내버려둡니다. 어차피 목적지에 비슷한 시간에 도착하게 되는데 그냥 연장자가 원하시는대로 놔두면 불필요한 소모전을 하지 않아도 되니까요.

그런데 미국인들은 "언쟁에서 이긴다"라는 것에 집착하는 경우가 꽤 있어요. 자유로운 토론문화가 발달한 미국이지만, 이기고 진다는 일차원적인 결과론에서는 자유롭지 못한 탓인지 상대가 누구든지 이기려고 기를 쓰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특히 업무 회의 시간에 미국 동료들을 보고 있노라면, 자기 주장을 관철시키는데에만 몰두한 나머지 사소한 것에 집착하는 것 같다는 느낌도 듭니다. 꼭 자기가 원하는 루트로 목적지에 도달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거예요

이러면 자연히 보스와 충돌이 잦을 수 밖에 없죠. 예를 들어 도착예정시간이 겨우 3분 차이인데  3분 차이를 가지고 보스를 물고 늘어지는 거예요. 물론 이해는 합니다. 작은 차이라도 루트 B 더 효율적이라면 그리로 가면 좋겠죠. 그런데 이 3분이 정말 보스와 언쟁을 할 만한 가치가 있는 걸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판단했습니다만, 미국인 동료들에게는 "내 의견대로 한다"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것이 그들이 말하는 "주체적인 삶"이거든요.

보스 입장에서는 사소한 일로 사사건건 대립하는 직원보다는 그냥 흘러가게 놔두는 직원이 편하겠죠. 그래서 언뜻 보기에 저희 보스는 제게 친절한 듯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보스는 어디까지나 보스죠. 속을 들여다보면 딱히 다를 것도 없답니다.


두번째 이유. 설령 보스가 친절하지 않다고 해도!

이걸 행운이라 여겨야 할지 모르겠지만, 사실 저는 보스가 제게 못되게 굴어도 크게 상처받지 않는답니다. 부하직원위에 군림하는 상사가 드물지 않은 한국에서 나고 자랐기 때문인 것 같아요.. 비단 회사 뿐만 아니라 어느 집단이라도 선배라는 이유로, 연장자라는 이유로, 상급자라는 이유로 아래사람을 비인격적으로 대하는 사람들을 만난 경험이 많기 때문에 상급자로부터 받는 스트레스는 어느 정도는 "기본값"으로 인식한달까요? 보스가 화풀이를 하거나 괜히 시비를 걸어도 '원래 직장생활이 그런거려니...' 하고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는 거죠. 

사실 저만 그런게 아니라 대부분 아시안계 직원들이 보스의 불친절함에 대한 방어력이 강하답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물어봐도 확실히 아시안계 직원들이 그런 면에서 터프하더라구요. 미국인 보스는 아무리 막 나가도 직원에게 목소리를 높이거나 험한 말은 잘 안하거든요. 기껏해야 한두마디 면박을 주거나 혹은 신경질적으로 대한다거나 하는 정도죠. 저는 한국에서 직장상사를 경험해 본 적은 없지만, 학교를 다니면서 이보다 훨~씬 심한 선생님들을 만난 적이 있어서 이쯤은 가볍게 넘길 수 있더라구요. 다른 아시안계 직원들도 다 비슷해서 우리끼리는 이런 말을 한답니다.

It's Asian Mentality
이건 아시안식 마음가짐 (정신력) 이지

그런 면에서는 미국인 동료의 말처럼, 제가 직장을 편하게 다니고 있는지도 모르겠네요. 미국인 동료들은 보스의 한마디 한마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특히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으면 그것에 대해 몇 날 며칠을 불평한답니다. 같은 보스 아래 있는 미국인 동료들이 툭하면 제게 하소연을 하는데, 참 난감해요. 처음에야 공감해주고 위로해주곤 했는데 허구헌날 같은 불평을 듣다 보니 저도 속으로 이런 생각이,

'원래 직장 상사라는 건 그런 게 아니겠니.
그리고 제발 너도 눈치 좀 있어라.
네가 별 거 아닌 일에도 네 말이 맞다고 박박 우길 때마다 보스가 짜증내는 걸 알면서 왜 그렇게 포기를 못하니...'


동료가 매일 같이 "난 이 회사에서 우울해. 난 내 능력을 알아주는 보스 밑에서 일하고 싶어. 집에 갈 때마다 슬퍼." 라며 우는 소리를 하면서도 매 회의시간마다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걸 보면 참... 경탄해야할지 경악해야할지 알 수가 없답니다. 악순환의 원인은 자신에게도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제게 "방인이 너는 편하게 회사다녀서 좋겠다" 라고 말할 때... 어쩐지 보스가 신경질내는 이유를 알 것도 같다는 느낌적 느낌이 머리를 스쳐지나갔지요. 

수동적인 삶을 권장하는 것 같아 쏙 마음에 드는 속담은 아니지만 옛말 틀린 것 없다고 하죠?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다는 옛사람들의 지혜를 떠올려봅니다. 


여러분 즐거운 하루, 유후~

  • 베짱이 2020.02.05 21:59 신고

    개인주의와 집단주의의 차이같네요.
    미국은 개인을 존중하는 개인주의가 일반적이고
    식민지배-군사독재 등의 비슷한 군대문화를 경험한 아시아는 집단주의에 익숙하죠.
    개인주의가 기본값인 보스 입장에서는 개인의 가치를 희생하는 집단주의적인 태도에 대해 속으로는 미안하게 생각 할 수 있죠.
    적절히 상황에 맞게 유동적으로 포지션을 잘 잡아가는 게 좋아보여요. ㅋㅋ

    • 이방인 씨 2020.02.13 04:47 신고

      맞아요. 미국인들은 집단문화를 잘 모르죠. 언젠가 한국에는 "메뉴 통일"이라는 문화가 있다고 했더니 미국 친구들이 깜짝 놀란 기억이 있답니다. ^^ 문화충돌이 스트레스이긴 한데 또 나름 재미있기도 해요. 아니.. 재미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힘들어서 이민생활 못할 것 같아서 그런지도요. 하하.

  • 단발머리♥ 2020.02.06 09:50

    ㅋㅋㅋㅋ제 성향으로 봐서는 저는 방인님이 현명하다고 생각하는데 ㅋㅋㅋㅋㅋ뭐 사사건건 논쟁하면 그 에너지 소모 너무 힘들지 않나요? 일도 힘든디 ㅋㅋㅋ저도 웬만한 부분은 상사 말 따를려고해요. 진짜 아닌건 따지는게 맞지만 하나하나 따지려면 느무느무 힘들어요ㅠㅠ아 쓰고 보니 나도 너므 아시안 멘탈이네용 ㅋㅋㅋㅋ온니 한국인만 있은 우리 직장도 따박따박 이야기하고 상사랑 논쟁하는친구들도 많아요. 사람 개인 성향 차이도 큰 듯 해요.ㅋㅋ저의 회사 생존법은 최대한 상사랑 말 안 섞기 입니당 ㅋㅋㅋ안잘해줘도 좋으니 안맞주치는게 젤 좋음 ㅋㅋ

    • 이방인 씨 2020.02.13 04:50 신고

      저랑 단발머리님 비슷한가 봅니다. ^^. 저도 감정소모에 취약해서 따지는 걸 잘 못해요. 따져서 이득이 되는 부분도 있겠지만 어지간해서는 소모하는 에너지와 감정이 더 큰 것 같아서 그냥 넘겨버려요. 저랑 성향이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답답할 수 있겠지만 저는 이렇게 사는 게 편하네요. ^^

  • 골드미즈 2020.02.06 14:37 신고

    저도 한국인이라 그런가 이방인님의 의도는 잘 알겠는데, 도리어 그런 것을 외쿡사람이 신기해한다니 그 역시 신기하네요.ㅎㅎ
    그러나 무엇보다 자기말을 잘 들어주고 딸랑딸랑 해주는 사람이 이뻐보이는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동일하네요!!
    읽으면서 전 외국에서는 못살것이며, 지금의 소규모 25인사업장이 천국처럼 느껴지고 있습니다.
    동서양 문화를 다 접해서 융통성있게 적용해가면서 대처하시는 이방인님께서 진정 멀티플레어이자 직장에서 능력자로 거듭나시길 바랍니당~ 화이팅~

    • 이방인 씨 2020.02.13 04:54 신고

      그건 정말 동서양이 다르지 않더라구요. 여기도 나름대로 "처세"의 기술이 있어서 그런 걸 잘하는 사람들이 회사에서 승진도 빠르고 오래 살아남고 그러더라구요. 그 기술이 한국과 다른 점도 많지만, 어쨌든 관찰결과, 고도의 기술인 듯 보입니다. ㅋㅋㅋ
      절차와 계급으로부터 자유롭다는 측면에서 소규모 사업장이 더 좋은 것 같아요 저도. 골드미즈님도 화이팅입니다! ^^

  • vision2real 2020.02.14 16:51 신고

    한동안 인터넷을 사용할 수 없는 상황에 있다가 오랜만에 글 봅니다~~^^ 아이폰이 먹통이 되니 삶이 disconnected 되는 거 같습니다 ㅋ 애플이 수리는 못해주고 리퍼 교체만 된다고 해서 사설 수리업체를 전전하다가 겨우 살려냈네요~~와우!

    • 이방인 씨 2020.02.25 02:45 신고

      고치셨다니 다행이네요! ^^ 저도 스마트폰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가 없네요. 중독은 아니지만 의존도가 높아서, 스마트폰이 망가진다면 저 역시 세상과 단절되는 기분일 것 같아요. 요즘 스마트폰을 거부하고 아날로그로 회귀하는 사람들이 많다는데, 저는... 이미 망했어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