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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lcome to California

오바마 대통령의 연설을 방해한 한국 청년의 사연

by 이방인 씨 2013. 12. 5.

얼마 전에 오바마 대통령이 샌프란시스코 차이나 타운에서 이민법 개혁에 관한 연설을 했습니다.
그런데 대통령의 연설 도중 회장 안의 누군가가 이렇게 소리쳤죠.

"나는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우리 가족은 추수감사절을 함께 보낼 수 없어요. 행정명령을 내려 주세요. 당신은 그럴 힘이 있잖습니까."

한정된 수의 청중만이 있는 실내에서 연설 중에 그렇게 소리를 쳤으니 대통령이 말을 끊은 것은 물론이고 경호원들이 다가 와서 목소리의 주인공인 24세의 한국인 청년을 제지했습니다.

신문에 난 기사를 보니 이 젊은이는 2001년에 어머니, 누나와 함께 관광비자로 미국에 입국하였으나 12년이 지난 지금까지 불법으로 미국에서 체류하며 대학까지 다 마친 상태더군요.
합법적 절차를 거치지 않고 미국에 머무르고 있는 불법체류자 중에 한국인의 수는 중남미 4개국 (멕시코 ← 압도적 1위, 엘살바도르, 과테말라, 온두라스) 다음으로 많은 5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중남미 국가에서 밀입국을 통해 들어오는 불체자들은 지리 상 가깝고 루트가 많아 막아내기 역부족이기 때문에 오래전부터 미국의 두통을 유발하고 있었지만 아시아에서는 한국과 필리핀만이 순위권에 들었네요.

아시겠지만 불법체류라는 건 당국의 체류허가를 받지 않은 사람들이 해당 국가의 법을 어기면서 머물고 있는 걸 말하죠?
한국인 불법체류자들 중의 대부분은 관광비자/유학비자로 입국하여 허가된 기간을 다 넘기고도 그대로 미국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인데 적법한 이민비자를 받을 수 없는 상황이거나 아주 오래 기다려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다행히 지난해 오바마 대통령은 불법체류자 청소년/청년들을 구제해야 한다는 추방유예 행정명령 (DREAM 법안)을 내려 최근 1년 사이 합법적 체류신분을 얻은 불법체류자 한인 청년이 7,000명 가까이 된다고 합니다.
참고로 미 전역에서 추방유예 신청을 한 불법체류자 청년 (모든 출신 국가 포함) 46만 5033명 중에 45만 5455명이 구제되어 기각률은 겨우 2.1%에 머물고 있다니 앞으로 더 많은 불체자 청년들이 합법적 신분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수치는 미주판 중앙일보에 나온 자료입니다.)

그런데 대통령의 연설 중 소리를 친 한국인 청년은 보다 빠르고 보다 광범위한 대책을 원했던 모양입니다.
신문 인터뷰를 통해 "난 대통령의 연설을 방해한 것이 아니라 사실을 말했을 뿐이고, 내 행동이 자랑스럽다"고 밝혔더군요.
저야 그 청년과 같은 처지에 놓여 본 적이 없으니 '얼마나 절박하면 그랬을까' 싶기도 하지만 이 행동이 자랑스럽다니... 고개를 갸웃할 수 밖에 없습니다.
애초에 문제의 시발점이 어디 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나 싶은데요.

미국에서 합법적 체류 비자를 주지 않았는데, 법을 어기며 그대로 미국에 살고 있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민비자 받는 과정이 얼마나 까다롭고 지리멸렬한지는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저희 가족도 이민 신청부터 합법적 영주 비자를 받기까지 한국에서 무려 7년이라는 세월을 기다렸거든요.
제가 어머니께 처음으로 "미국 이민 신청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게 초등학생 때였는데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미국에 왔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심지어 그보다 더 오래 10년 이상을 기다려서 온 분들도 있더군요.
편법이 존재한다는 걸 몰라서가 아닙니다.
10년이 걸리더라도 미국이 정한 적법적 절차를 거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잖습니까.

혹시 제 글을 읽는 독자들 중에 미국에서 불법체류중인 한국인이 계시다면 상처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기에 조심스럽습니다만 저는 불법체류자를 구제하겠노라는 오바마 대통령의 의지와 그에 따른 미 당국의 현재 입장도 매우 관대한 편이라고 생각합니다.

알기 쉽게 입장을 바꿔 한 번 생각해 볼까요.
만약 한국 정부의 허가를 받지 않고 불법으로 체류하고 있는 외국인들이 자신들도 한국에서 합법적으로 체류할 수 있게 법을 개정하라며 시위를 하고, 박근혜 대통령이 연설하는 도중에 소리를 친다면...?
제 짐작으로는 '말 같지 않은 소리하지 말고 당장 당신들 나라로 돌아가라'며 분노하는 한국인들이 굉장히 많을 것 같습니다.
비단 한국 뿐만 아니라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불체자들을 좋은 눈으로 보는 국민들은 그리 많지 않겠죠.
같은 한국계로서 안타깝게 생각하는 제 눈에도 그 청년의 행동은 절대 "자랑스러워" 할 만한 일은 아닌 듯 하거든요.

불체자들에게 무척 다행스럽게도 대대로 이민자들에게 익숙한 미국인들의 여론은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11월 25일에 발표된 미국의 PRRI(Public Religion Research Institute)의 전화 설문조사에 따르면 설문에 응한 미국인들 중 67%가 불법체류자에게 시민권 취득을 허용하는 이민개혁안을 지지한다고 밝혔습니다.
불체자들을 추방해야 한다는 의견은 18%에 그쳤다고 하네요.
이민개혁안에 찬성하는 미국인들 중 오바마의 민주당을 지지한다고 밝힌 사람이 73%, 보수진영인 공화당파라고 밝힌 사람은 60%였습니다.
또한 아무런 조건없이 시민권을 부여하자는 방안에는 59%가 찬성했고, 밀린 세금 납부, 신원조회 등의 조건을 추가하면 찬성률은 71%까지 상승했다고 합니다.
전화설문에 응한 미국인들의 의견만 가지고 전체 상황을 짐작할 수는 없지만 호의적인 사람들이 더 많다는 건 알 수 있네요.
반면 불체자 추방 시위를 하는 미국인들도 있으니 이민법 개혁 성사를 섣불리 단언할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기각률 2.1%에 머물고 있는 현재 구제 현황을 본다면 앞으로 남은 오바마 행정부 기간 동안 더 많은 불체자 청년들이 합법적 신분을 취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문제 관한 여러분의 생각이 굉장히 궁금합니다.
댓글 참여 부탁드려요.

오늘도 신나는 하루 유후~


이 글은 미국내 불법체류자들을 비난하려는 의도가 없음을 밝힙니다. 다만 대통령의 연설 중 소리를 치고 그것을 자랑스워하는 건... 오히려 미국인들의 반감을 살 수 있는 극단적인 태도가 아닐까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