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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직장생활

미국 회사 상사들이 1년에 한 번 직원들에게 뇌물을 주는 이유

by 이방인 씨 2019. 11. 19.

제가 미국에서 몸 담고 있는 직장에는 약 4,000여 명의 직원들이 17개의 부서로 나뉘어 일하고 있습니다. 사장님 및 임원들은 바로 이전 글(2019/11/16 - [미국 직장생활] - 사장님에게도 주차자리 양보 없는 미국 회사 직원들)에서 언급한 "직원과의 만남"을 위시하여 크고 작은 여러 행사들을 통해 직원들의 환심을 사려 복지향상을 위해 노력하고 있답니다. 그중 하나는 1년에 한 번 전 직원들을 대상으로 하는 "직장생활 만족도" 설문조사인데요. 사측에서는 저명한 컨설턴트를 초빙하여 개발한 설문이라며 굉장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듯합니다만, 상당수의 사원들은 딱히... 참여하려는 의지가 강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말이죠,

1. 보복이 두려워

사측은 이 설문조사는 100% 무기명이며, 절대로 누가 어떤 답을 했는지 아무도 알 수 없다고 말합니다. 무기명인 것은 사실입니다. 이름, 성별, 나이, 소속 부서 등등은 질문하지 않거든요. 그러나 사원들 중에는 이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조사는 온라인으로 진행되는데 설문조사 링크가 직원들의 이메일을 통해 배포되어, 대부분 회사 컴퓨터로 조사에 응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회사 컴퓨터라는 것이, 각 직원의 이름과 컴퓨터 번호로 등록 및 관리되다 보니, 누가 어떤 대답을 했는지 밝힐 수 있는 방법이 있단 말이죠. 사측에서는 절대로 조회하지 않는다고 강조하고, 그것이 사실일 수 있지만, 어디에나 합리적 의심을 품는 사람들은 있기 마련이니까요. 해서 조사에 참여하지 않는 직원들이 많습니다. 

2. 말해 무엇하랴

또 한 가지 이유는 조사에 참여해봤자 달라지는 게 없다는 비관입니다. 매년 엄청난 분량의 설문에 대답해봤자 달라지는 게 없는데 왜 시간낭비를 하느냔 말이죠. 이런 직원들은, 사측이 직원들의 직장 내 행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겉모습을 보여주기만을 원할 뿐, 실제로 변화하려는 의지는 없다고 말합니다. 그 증거로 설문으로 불만을 제기해도 개선되는 사항이 딱히 없다는 점을 들고 있습니다.


민심(?)이 이러하여 사측에서 야심차게 준비한 설문조사의 응답률은 늘 50-60%대에 머물러 있는 상태로, 직원들은 그저 귀찮은 연례행사쯤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장님은 직원들의 마음을 꼬~옥~ 알고 싶다는 열망으로, 응답률을 높이기 위해 지극히 민.주.적.인 방법을 동원하게 되는데 바로 각 부서의 최고책임자들을 닥달하는 것이죠. 사장님이 모두가 모인 임원회의에서 부서별로 응답률 항샹에 힘쓰라는 발언을 여러 번 하시면서 부서 책임자들에게 부담을 주시는 바람에 각 부서장들은 서로 응답률을 높이려는 경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직원들에게 말로만 하는 부탁은 효력이 없기에 부서 책임자들의 크고 작은 뇌물공여가 시작되는데 이것이 참 눈물겹답니다.

제가 작년까지 일하던 200명 규모의 부서에서는 2017년 설문조사가 다가오자 최고책임자께서 공약하시길, 이번 조사에서 응답률 70%를 달성하면 모두에게 아이스크림 파티를, 80%를 달성하면 커피와 머핀 파티를, 90%를 달성하면 점심시간에 피자 파티를 사비로 열어주겠노라 하셨습니다. 독자분들 중에서는 '이 까짓게 무슨 뇌물이냐' 코웃음 치시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으나, 상사라고 돈 쓰는 일이 드문 미국에서 이 정도의 사비 사용은 흔치 않답니다. 미국 상사들이 얼마나 직원들에게 돈을 안 쓰는지 궁금한 분들은 이 글을 읽어보시길. (2019/11/09 - [미국 직장생활] - 미국 직장 상사에게 밥 얻어먹기란 하늘의 별따기)

그리하여 200명이 모두 합심하여 응답률 92%의 기적을 이룬 저희들! 조사가 끝난 후 다음날 점심 모두가 실컷 피자로 배를 채울 수 있었답니다. 200여 명의 직원들이 모두 Large 사이즈로 2조각 이상을 먹을 수 있었던 걸로 짐작하건대 부서장님은 그 날 적어도 50판의 피자를 사비로 사신 셈이죠. 재밌는 사실은, 그다음해인 2018년에는 다른 부서장님이 계셨는데 이 분은 아마 전년도 응답률만 보고 받으시고, 어떻게 그 수치를 달성했는지는 모르셨던 모양입니다. 그 분은 아무 공약도 내걸지 않으셨는데, 그 결과로 2018년 응답률은 68%로 전년대비 -24%를 달성했답니다. 경 to the 축.

2019년에도 역시 돌아온 설문조사. 저는 그 사이 부서이동을 한 지라 여기서 또 한 번의 고군분투를 목격하게 됩니다. 설문조사는 한 달 동안 집계가 되는데, 이 부서의 최고책임자인 본부장님은 그 한 달의 기간 동안 매주 실시간으로 응답률의 추이를 보고 구체적인 달성 수치와 함께 다양한 먹거리들을 제공해주셨습니다.

첫 주의 응답률은 고작 28%에 불과했는데, 그 주 수요일 저희는 흥겨운 컵케익 파티를 벌였습니다. 컵케익 제공 후, 그 다음 주 수치는 소폭 상승한 34%. 그리하여 둘째 주 수요일에는 또 한 번의 이메일 읍소와 함께 나초 파티를 열 수 있었죠. 세 번째 주 응답률은 47%. 설문 마감까지 1주 밖에 남지 않았는데 아직 절반도 넘지 못하였습니다. 애가 타신 본부장님, 그 주 수요일에는 피자 잔치였습니다. 으~아~니, 전에 있던 부서에서는 피자 파티가 끝판왕이었는데, 이곳에서는 3주 차에 등장했군요. 그렇다면 대미를 장식할 넷째 주에는?!

대형 그릴까지 등장한 전 직원 바비큐 파티였습니다!
(이 사진은 참고용일 뿐, 실제 파티 사진이 아님을 밝힙니다.)

오옷~! 이거슨 정말이지 대단했답니다. 대형 그릴에 점심시간에 맞춰 구운 고기며 소시지, 음료와 스낵, 그리고 마무리 아이스크림 후식까지!

이러한 본부장님의 노력에, 저희들은 마지막 주에 드디어 응답률 90%를 돌파하며 화답하였지요. 그리고 그 수치를 본 본부장님, 감격에 겨워 이러한 말을 남기셨습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감사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진심 어린 호소가 실패할 때도 뇌물은 통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시켜주었습니다. 내년 조사를 어떻게 대비해야 할 지도 분명히 알겠네요. 다음에도 90%를 달성해봅시다!

본부장님의 농담에는 뼈가 있었을 수도(?) 있으나, 아랑곳하지 않는 직원들은 맛있게 바비큐를 즐겼답니다. 내년에는 또 어떤 파티 공세를 받게 될지 사뭇 기대가 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