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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lcome to California

미국에서 알게 된 풍요로움의 부작용

by 이방인 씨 2012. 11. 27.

저도 그렇지만 많은 분들이 미국에 와서 "풍요로움" 이 뭔지 실감했다는 말씀들을 하십니다.
90년대 이전에 이민오신 분들이야 더 말할 것도 없지만, 저처럼 한국의 고속성장이후를 경험한 세대도 미국에 와보니 '이게 정말 세계에서 제일 잘 사는 나라구나...' 싶더라구요.
유럽이나 일본도 여행해봤지만 미국처럼 모든 것이 넘쳐흐른다는 느낌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전에 말씀드렸다시피 미국인들은 이미 익숙하게 살다보니 물자의 낭비가 심한 편입니다.
그런 무의식적 낭비가 풍요로움의 첫번째 부작용이라면 오늘은 또 다른 애로사항(?) 을 이야기할까 합니다.

제가 언젠가 동네 슈퍼마켓에 씨리얼을 사러 갔을 때의 일입니다.
동네 슈퍼라고 해도 엄청나게 스케일이 크다보니 한국의 대형마트의 식품부 정도 될까요?
씨리얼 코너로 접어들었더니 어림잡아도 30개 정도되는 다양한 종류의 씨리얼 앞에 서 있는 남성이 보이더라구요.

 

흔히 이름을 알고 있는 씨리얼만 해도 이 정도가 되니까
잘 알려지지 않은 종류와 한 종류에서도 다양한 Flavor 까지 더하면 얼마나 많은지 감도 안 잡힙니다.

 

미국은 언제 어디서나 개인간의 거리인 Personal Space 가 중요하기 때문에 그 남성분에게 너무 가까이 붙이 않고 멀찍이 떨어져서 저도 씨리얼을 고르기 시작했습니다.
그 남성분 역시 진열대 앞에서 물러나 제게 공간을 내주면서 약간 쑥쓰러운 듯 웃으며 말하더군요.

 

Excuse me. It's just OPTION ANXIETY.  미안해요. Option Anxiety 때문에요...

 

듣고 나서 빵 터져서 대답했습니다.

 

I know. Same here.  맞아요. 저도 그래요.

 

이 대화속에 등장한 OPTION ANXIETY 라는 말, 저는 미국에 와서 처음 들어봤답니다.
Option 이란 건 "선택사항, 선택권" 이라는 뜻으로 그 마켓에 씨리얼을 사러 간 사람에게는 30개 정도의 옵션이 있는 셈이죠.
Anxiety 는 "불안감, 걱정거리" 란 뜻으로 긴장하거나 초조할 때 많이 쓰는 표현입니다.
Option Anxiety 하면 너무 다양한 옵션들이 존재할 때 도무지 결정을 내릴 수 없어 초조하고 불안한 상태를 가르키는 말이랍니다.
아래는 제가 option anxiety 로 찾은 사진들입니다.

 

 식빵에 발라먹을 잼 하나 사는데 얼마나 많은 고뇌를 해야합니까...!

 


그저 탄산에 목마른 어린이가 갈증을 풀려고 해도 얼마나 뚫어지게 살펴봐야하는지요...

 

슈퍼마켓 진열대들을 위에서 내려다 본 사진입니다.

 

전체샷을 보니까 완전히 물건에 눌려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비단 마트의 식품뿐만이 아니죠.

대부분의 동네에서 접할 수 있는 패스트 푸드 식당들의 종류뿐만 아니라


집으로 날아오는 TV 케이블 광고 전단지만 해도 이렇습니다.
200개 이상의 채널을 제공하고 있다고 하네요.
실제로 저희 가족이 뭣도 모르고 100이상 채널을 주는 케이블을 신청했었는데
처음에야 좋더니 나중엔 머리가 터질 것 같더라구요.

 

이런 Option 의 홍수속에 살다보니 가끔은 정말 무언가 선택하려다가 초조해질 때가 있죠.

아아악~~!! 선택은 너무 많은데 시간은 너무 없어!!

 

이제는 대형마트가 너무 많이 들어선 한국에서도 이런 감정 느끼시는 분들 계실 것 같습니다.
미국인들은 이렇게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시절을 너무 오래 살아와서 그런지 요즘 이런 재밌는 말을 하기도 하더군요.

 

LESS choice MORE happiness.  선택이 적을수록 더 행복하다. 

 

세계 다른 나라들이 부족하게 살 때도 실컷 누리며 살아와놓고 이제와서 배부른 소리냐고 하실지도 모르지만 실제로 미국내 통계를 보니 마트에 진열된 옵션이 많을수록 오히려 구매율은 떨어진다고 하네요.
머리가 터지도록 고민하다가 결국 '차라리 안사고 만다. -.-^' 하고 돌아선다는 소리죠.

저 역시 한국 시골 마을에 살 때는 동네 슈퍼갈 때마다 '여긴 선택의 여지가 없어. 그냥 주인 아주머니가 갖다놓은 거 사야돼.' 하며 툴툴 거리기도 했었는데 요즘 물건 살 일이 있어서 매장에 갈 때마다 복잡합니다.

 

아놔~ 도무지 모르겠어... 차라리 동네 구멍가게 쇼핑이 훨씬 쉽고 편했어. ㅠ_ㅠ

 

"대충대강" 에 익숙한 저도 간혹 이렇게 피곤하니, 주변의 꼼꼼한 성향의 사람들은 물건 하나 살 때마다 시간이 이만저만 오래 걸리는 게 아니더라구요.
그리고 더 큰 문제는 그렇게 고민해서 사고도 나중에 '다른 걸 샀으면 어땠을까...' 하고 후회한다는거죠.
가지 않은 길이 한 두 갈래만 되도 마음에 남는데 이건 뭐 수십 갈래의 못 가본 길이 있으니 복잡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문제는 더 이상 미국만의 고민이 아니겠지요.
한국은 물론이고 어느 나라든 경제가 발전을 하면 할수록 물건의 홍수속에 우리 정신은 더 피곤해지고 있는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고민없는 좋은 하루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