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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lcome to California

미국에서 가정폭력으로 고발당한 한인교포 통역을 맡았더니

by 이방인 씨 2013. 7. 22.

여러분 모두 졸린 눈 잘 비비고 일어나셨나요?
이틀전 제가 평소보다 늦게 글을 올리면서 아침 일찍 일이 있었다고 했었죠?
오늘은 그 일이 무엇이었는지 알려 드릴게요.

며칠 전 어머니가 평소 알고 계시던 중국계 미국인 친구가 급하게 한-영 통역을 해줄 사람이 필요한데 제가 도와줄 수 없겠냐고 물으셨습니다.
너무 급하다고 두 번이나 전화가 왔길래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가겠다고 했죠.
미국 Social Worker와 한인 교포 사이의 통역이라고만 하길래 정부 지원금이나 서비스에 대한 상담일 거라고 막연히 짐작했습니다.
하지만 아침에 그 한인교포분 댁에 갔더니 제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라 당황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한인교포분은 가정폭력으로 고발을 당해서 해당 기관에서 조사를 나온 것이더군요.

미국인들은 신고정신이 투철해서 꼭 자기에게 닥친 일이 아니어도 이웃의 가정폭력이나 아동학대 동물학대를 자주 고발합니다.
무슨 일인지 알고 나니 놀랍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했지만 이제 와 못 하겠다 할 수도 없으니 꼼짝없이 옆에 앉아 말을 옮기기 시작했죠.
가정폭력이라는 것이 대부분 그렇지만 남편의 폭언과 폭행 때문에 고발을 당한 것이었는데 부인에 대한 살해협박까지 있었다는 보고서를 가지고 왔더라구요.

이 날은 부인과 어린 딸이 집에서 조사를 받았는데 부인이 털어놓은 이야기는 그리 간단한 가정폭력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미국인이 이해하기 힘든 한국 문화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도 할 수 있을 텐데 사연은 이렇습니다.

이 한인 교포 부부는 십여년 전에 미국으로 이민을 와서 아이들을 낳고 평범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2년 전에 부인의 부모님, 남편에게는 장인 장모님이 미국으로 오시게 된 겁니다.
사위는 장인 장모님이 미국에 집을 얻을 때까지만 한 집에 있게 될 줄 알았지만 장인 장모님은 딸 집에 계속 살려는 마음이셨다네요.
아무래도 낯선 땅에서 의지할 데라고는 딸 밖에 없어서 그러셨던 거겠죠.
남편은 의견이 달랐지만 장인 장모님을 내쫒을 수도 없는 일이라 불편한 동거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의 사정은... 여러분 모두 안 봐도 짐작하시겠죠?

본의 아니게 처가살이를 시작한 남편의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부인은 부모님 돌봐드리느라고 남편과 아이들에게 전보다 소홀한 면이 생길 수 밖에 없었구요.
그러다 보니 갈등이 점점 심해지고 남편은 남편대로 화가 쌓인 거죠.
가출을 한 적도 있고 동네 시끄럽게 난동을 피워 신고가 들어와 하루 구류를 살기도 했답니다.
부모님과 1년 정도를 함께 사는 동안 남편은 점점 폭력적으로 변하고 부인은 우울증까지 생기는 바람에 최근 부모님은 근처 노인 아파트를 얻어 나가셨다고 하네요.

여러분은 이 이야기를 듣고 무슨 생각을 하셨나요?
결혼한 자식이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경우가 흔한 한국에서는 고부갈등이니 장서갈등이니 제법 자주 들을 수 있는 일이죠.
갈등을 겪는 사람은 많아도 그 때문에 이웃이 신고하는 일은 드무니까 이런 심각한 사태까지는 벌어지지 않겠지만요.

부인은 그냥 가족들끼리의 일이 소란스러워진 것 뿐이라고 말했지만 미국에서는 아무리 가족끼리의 문제라도 해당기관이 알게 된 이상 그냥 넘어가기 쉽지 않습니다.
일단 발신고가 들어왔기 때문에 가족을 다 조사해야 하고 혹시라도 범죄 사실이 인정되면 처벌을 받고 더욱이 이런 환경에서 아이들이 정상적으로 생활할 수 없다고 판단되면 그에 적절한 조치도 취하게 됩니다.
한국에서 이런 신고를 받았다면 문화·정서상 적당한 선에서 가족들끼리 알아서 해결하라고 기관이 개입하지 않을 확률이 높지만 로마에 오면 로마법을 따를 수 밖에 없는 터, 미국에서 이 가족에게 어떤 결정이 내려질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남편과 아들의 말도 다 들어보고 결론을 내야하기 때문에 아직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문제네요.

부인의 말을 옮기는 내내 저도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노부모님 봉양은 유교문화권인 한국에서는 사람의 도리를 지키는 일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이 본국에도 많고 심지어는 이렇게 미국에도 있으니 참 복잡한 심정이더군요.
미국 기관에서 조사를 나왔다고 잔뜩 긴장해서 안절부절 못하는 그 교포분을 보니 너무 안쓰럽더라구요.
몇 번이고 저에게 "이제 남편은 어떻게 되는 거냐"며 물으셨지만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대답이 뭐가 있겠습니까...
아직 조사도 다 끝나지 않았고 결론과 결정이 나기까지 더 기다려야 하지만 원만히 해결되기만을 바랄 뿐이죠.
이 일의 진척상황은 앞으로 여러분께도 귀뜸해 드리겠습니다.

참, 문제의 본질에서는 벗어난 이야기이긴 하지만 미국 Social Worker의 작업방식을 옆에서 지켜 보니 참 감탄스럽더라구요.
그 이야기는 내일 자세히 쓰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모두 씩씩하게 월요일과 맞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