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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lcome to California

자유의 나라 미국에서 보장되지 않는 자유

by 이방인 씨 2019. 11. 23.

널리 알려진 대로 미국의 건국이념은 "자유와 평등"입니다. 미국 국가의 클라이맥스라고 할 수 있는 마지막 소절의 가사인 "land of the free and the home of the brave."도 직역하면 "자유로운 사람들의 땅, 용감한 사람들의 집"일 정도로 자유는 미국인들의 삶과 정신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자유를 억압하는 모든 행위 =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인권침해'라고 생각하는 미국인들의 사상은 마블의 히어로 영화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에도 잘 표현되어 있죠. 극 중 미국의 정신을 상징하는 캡틴 아메리카는 어벤저스의 자유를 보장하지 않는 소코비아 협정에 동의하기를 거부하며 아이언맨 토니 스타크와 첨예하게 대립합니다. 전 세계 국가들의 연합인 UN의 결정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소중한 자유를 지켜야 해!"라며 참된 미국인의 오만한 개인주의 자유정신을 보여줍니다.

이렇듯, 자유를 그 무엇과도 타협할 수 없는 가치로 여기는 미국에서 보장되지 않는 자유가 하나 있습니다. 실제로 법으로 보장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그렇게 느껴진다는 뜻이니 오해 마시길.

제가 근 20년 가까이 미국에서 살아 보니, 이 나라에는...

아이와 개에게 사랑과 찬사를 바치지 않을 자유가 없어요!


현재 저는 아이와 개, 둘 다 없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아이들 사랑스러운 줄 알고 아기도 엄청 좋아하지만, 제 자식을 낳아 기르는 부담은 원하지 않기에 가끔 이웃 아이나 동료의 아이를 보며 만족하고, 개는 무서워하는 편입니다. 생활 속에서 개와 아이를 접할 일이 드물다 보니 자연히 그들에 대해 잘 모르고, 어떻게 대해야 할지 고민스러운 순간들도 있습니다. 저는 그냥 개와 아이의 조용한 이웃이자 동료로 살고 싶을 뿐이에요!

그러나 개와 아이 사랑이 유별한 이 나라에서는 저 같은 사람을 가만 두지 않습니다. 우주에서 가장 소중한 생명체는 아이와 개인데, 그 둘이 없는 삶은 결핍이라고 생각하는 미국인들이 꽤 많기 때문입니다. 저의 선. 택.이라고 아무리 설명해봤자 

아유~ 그건 안 키워봐서 그래. 한 번 키워 봐! 얼~마나 행복하게요?

라며, 미국인답지 않은 오지랖을 부리기도 한답니다. 말로 오지랖 부리는 건 얼마든지 웃고 넘기겠는데 아이를 안아보라며 건네준다거나 자기 개를 예뻐하라며 들이미는 사람들도 있어서 난감한 상황이 연출될 때도 있죠. 제가 직접 겪은 일들만 나열하자면,

1. 아기를 거부하다니 네가 제정신은 아니구나~
작년에 같은 팀 동료가 첫 아이를 얻었습니다. 백일이 지나기 전까지는 외출도 삼가는 한국 풍습과는 다르게 미국인들은 생후 100일 미만의 신생아도 데리고 나가는 경우가 드물지 않습니다. 특히 '인간이라면 누구나 아이를 사랑한다'는 전제하에 살아가는 미국인들답게 아이를 낳으면 회사에 데려와 동료들에게 보여주는 걸 좋아합니다. 제 동료도 작년 9월 초에 아이를 낳았는데 생후 57일 만에 아이를 데리고 200명이 근무하는 사무실에 방문했답니다. 심지어 그 동료는 육아휴직 중이었는데 오로지 아이를 보여주겠다는 마음으로 회사까지 온 것이었어요. 사실 그간 다른 동료 두 명이 아이를 먼저 데려온 적이 있는지라 이번이 3번째였는데 매번 똑같은 광경이 벌어집니다.

1단계: 같은 팀이든 아니든, 일단 사무실에 있는 절대다수의 직원들이 다소 호들갑스럽게 일어나 아기를 맞이합니다.
2단계: 아이가 얼마나 사랑스럽고 귀여운지 칭찬합니다.
3단계: 외모 중, 부모와 닮은 부분을 찾아내서 반드시 언급합니다.
4단계: 돌아가면서 아기를 안고 온갖 의성어와 의태어가 난무하는 아기어로 말을 겁니다.
5단계: 아기가 뒤척이거나 울 기미가 보이면 "어이구 어이구~ Little OOO이가 엄마한테 가고 싶데요~" 라며 아기를 엄마에게 건네줍니다.

이 5단계의 과정을 10명이면 10명, 20명이면 20명이 모두 반복합니다. 하지만 저는 아기 안는 법을 모릅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신생아를 본 것이 24년 전의 일이니, 그 후로 아기를 안아본 적이 없거든요. 사실 그때는 저도 어린아이 었으니 성인이 된 후로는 아기를 안아본 적이 없는 셈이죠. 혹시나 실수하면 어쩌나 하고 마음이 영~ 불안해서 안고 싶지 않더라고요. 더군다나 100일도 안된 신생아라니까요! 어쨌든 이런 이유로 저는 동료의 아기를 눈으로만 예뻐했지 한 번도 안아본 적은 없습니다. 이번에도 조용히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데, 그때까지 아기를 안고 있던 다른 동료가 저한테 묻더군요. "방인 씨는 안 안아 볼 거야?" 저는 대답했죠. "아, 저는 아기 안는 법을 몰라요. 그냥 눈으로만 봐도 예뻐요." 여기서 그냥 넘어가야 되는데, 그 동료가 자꾸 큰 일을 만듭니다.

눈으로 봐도 예쁘지만, 안아보면 더 예뻐요~

하며 아기를 제게 넘겨주려고 하더라고요. 저는 기겁을 하고 그러다 큰일 난다며 도망가려고 했지만 그 동료는 저를 의자에 앉히더니 아기를 제 무릎에 내려놓더라고요. 양다리를 꼭 붙인 상태에서 허벅지 사이에 아기를 눕히면 안전하다면서요. 엉겁결에 아기를 제 무릎에 눕히게 된 저는 불안해서 꼼. 짝. 도 못하고 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있었습니다. 그런 저를 보고 주위를 에워싼 동료들이 모두 한 마디씩 거들더라고요. 

"세상에, 아기 안을 줄 모른다는 사람 처음 봤네. 평생 아기 못 안아봤나?"
"방인 씨, 이마에 땀 맺힌 것 좀 봐. 희한하다, 희한해."
"이렇게 예쁜 아기를 안아보지도 않겠다니!"

등등 저는 아기를 예뻐할 줄 모르는 별종 취급을 받았답니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하며, 자신의 잣대로 타인을 멋대로 바꾸려 해서는 안 되는" 미국이라는 나라에서는 아기를 안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은 반드시 개. 조. 해야 할 인간인가 봅니다.

2. 어서 나의 개를 경배하라!
미국인들에게 "개"란 어떤 존재일까요. 나라와 문화를 막론하고 애견인들은 많지만, 미국인들에게 개는 거의 전지적 동반자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개도 아닌 견공도 아닌 "개님"으로 불러야 적당하겠네요. 일례로, 저희 회사 본부장님은 40세의 나이에 본부장 자리에 오른, 매우 유능하고 야심 찬 분입니다. 외모에서부터 차도남 분위기를 풀풀 풍기는 일중독자죠. 철두철미한 본부장님은 자신의 사무실 벽에 걸린 커다란 화이트보드에 그 날 해야 할 일, 그 주에 해야할 일, 그 달의 목표, 그 해의 목표를 항상 적어두시는데 그 항목 중 하나가 바로 이겁니다.

하루에 두 번씩, 폰지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기.

여기서 폰지는 본부장님의 개님의 함자가 되겠습니다.

40세 초고속 승진 본부장님
차도남
작년에 결혼한 신혼
아내는 10살 연하의 미녀
사랑고백은 하루에 2번
그것은 개님께

미국인들에게 개란, 이런 존재입니다. 

사랑하기도 어마 무지하게 사랑하고 자랑스러워하기도 하는데, 말귀를 알아듣는 것, 외견이 아름다운 것, 배변훈련이 잘 된 것, 애교가 많은 것, 심지어는 털이 잘 날리지 않는 것도 큰 자랑거리가 됩니다. 하여 주변인들에게 자신의 애견을 자랑스레 내보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은데, 제 주변에도 그런 동료들이 꽤 있습니다. 사무실에 개를 데리고 올 정도로요.

지난 할로윈에도 한 동료가 애견과 함께 costume을 차려 입고 회사에 왔답니다. 배트맨과 로빈이더군요. 확.실.히. 귀엽긴 했습니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죠. 그러나 앞서 밝혔듯이 저는 개를 무서워합니다. 어린 시절 동네 골목을 지키고 앉아 미친듯이 짖어대던 이웃의 사나운 개 때문에 트라우마가 생겼거든요. 그러나 미국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그런 사실을 꽁꽁 숨기며 보통사람인 척 하며 지냈습니다. (미국에서 개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보통사람일 수 없답니다.) 간혹 주변인의 개를 마주하게 되면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 본능과 보통사람인 체 해야 한다는 강박이 서로 치고 박고 싸우며 저를 힘들게 합니다. 

할로윈에 동료가 개를 데리고 등장하자마자 동료들은 이번에는 개님 환영의 5단계를 실행했습니다.

1단계: 자리에서 일어나 개님의 방문을 경축합니다.
2단계: 개님이 놀라시지 않게 질서 정연하게 차례를 지키며 옥체를 만져봅니다.
3단계: 자랑스러움이 뿜뿜하는 주인에게 개님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말해줍니다.
4단계: 온갖 의성어와 의태어가 난무하는 개 언어로 개님께 말을 겁니다.
5단계: 은근슬쩍, 자리에 있지도 않은 자신의 개를 자랑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상황, 정말이지 제게는 고역이랍니다. 개 주변에만 가도 긴장이 되고 슬금슬금 도망치고 싶어 지거든요. 하지만 개를 예뻐하러 가지 않으면 저는 동료들에게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으로 인식될 것이 뻔합니다. 지난번 아기 사태에 이어 이번에도 쭈뼛거렸다가는 저의 인성에 대한 평판은 그야말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될테죠. 그리하여 저는 떨리는 손으로 간신히 개님의 등을 1분쯤 쓰다듬고, 털이 얼마나 색이 곱고 결이 부드러운지 칭찬한 뒤에 다른 동료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제 자리로 돌아왔답니다. 저의 어색함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기를 바라며 말이죠.

아이와 개는 분명 귀중한 생명으로서 존중받아 마땅한 존재이지만, 그들에게 쏟을 사랑의 크기를 내가 스스로 선택할 자유를 주세요. 미국인들아, 제발~!


* 이 글을 읽고 혹시 미국에서는 길에서 마주치는 아이나 개를 덥석 만지거나 예뻐해도 된다고 오해하시는 분들, 안 계시겠죠? 이건 어디까지나 서로 아는 사이의 지인이나 동료 사이에 해당되는 내용이랍니다. 모르는 사람의 아이나 개를 동의 없이 만지는 것은 무례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