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1일 월요일은 미국의 Veteran's Day라는 공휴일이었답니다. 모처럼 3일의 주말을 만끽하게 된 방인 씨. 일요일 저녁에 느긋하게 영화를 보기로 했답니다. 주말 영화 관람이야 평범한 일상이지만 이 경험은 아주 특별했답니다. 바로 한국영화 "기생충"을 미국 영화관에서 봤기 때문이죠. 미국에서 십 수년을 사는 동안 한국 영화를 미국 영화관에서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뉴욕, LA, 보스턴, 샌프란시스코, 시애틀 등등의 도시에서는 한국영화를 종종 상영한다고 하는데, 제가 살고 있는 곳은 대도시도 아니고, 아시안 인구가 많은 곳도 아니어서 일반 영화관에서 외국 영화 상영을 좀처럼 하지 않거든요. 제 기억으로는 BTS의 공연 실황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외하고, 정식으로 영화관에서 개봉한 한국 영화는 기생충이 최초인 듯합니다. (새삼 느끼는 BTS의 대단함이란!)
어쨌든 들뜬 마음으로 동행자와 함께 영화관에 조금 일찍 도착해서 표를 예매했습니다. 영화 시작하기 10분 전이었는데 상영관이 텅~ 비어있더라구요. '아무리 황금종려상에 빛나는 화제작이라 해도 아직 이 미국 소도시에서 한국영화에 관심 있는 미국인 찾기가 힘든가 보다.' 하며 조금은 서운한 마음으로 자리에 앉았습니다. 이 큰 상영관을 단독으로 쓰는 호사를 누릴 수 있겠다 위로하며 영화가 시작하길 기다리는데 몇 분 되지 않아 삼삼오오 미국인 관객들이 들어오더군요. 하나 둘 자리가 채워지더니 광고와 예고편이 다 끝날 즈음엔 상영관 절반이 관객들로 들어찼습니다. 저녁 6시 상영이었는데 한국인은 저 하나뿐인 것 같았고, 동남아시아계로 보이는 동양인 서너 명, 그리고 나머지는 백인, 흑인, 히스패닉 등의 미국인들이었습니다. 관객이 이만큼이라도 든 것에 기뻐할 찰나, 영화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정신없이 영화에 빠져들어 시간가는 줄 몰랐네요. 정말 굉장한 흡인력을 가진 작품이더군요. 물론 영어 자막이 나왔지만 한국어 Native Speaker인 제게 자막은 그저 화면에서 걸리적거릴 뿐이지요. 후훗~! (거들먹 거들먹)
한국어 표현을 어떻게 번역했나 궁금해서 가끔 자막을 들여다보긴 했는데, "짜파구리"가 조금 애매하게 Ram-don (라면과 우동을 합친 듯합니다.)이라 번역된 것을 제외하고는 매끄럽게 볼 수 있었습니다. 하기야 짜파구리를 그 이상 어떻게 표현하겠어요? ^^;;
영화에 집중해서 보는 와중에도 어쩐지 미국관객들의 반응에도 귀 기울이게 되더군요. 이들이 과연 한국적 정서나 유머에 얼마나 공감할 수 있을지 궁금했기 때문이죠. 여러 장면이 기억에 남는데, 가장 큰 반응이 나왔던 장면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영화 내용의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영화를 볼 계획이 있는 독자들은 영화를 보신 후에 읽으시면 좋겠네요.
1. 옥스포드 대학교에 문서위조 학과가 없나?
극 중 딸 기정이 위조한 대학 재학증명서를 보며 기택이 감탄하는 장면에서 "서울대학교에 문서위조 학과 없나?" 하는 대사가 나오는데, 번역가는 서울대를 Oxford 대학으로 바꾸었지만 대사의 의미는 그대로 전달되어 관객들이 빵 터졌답니다.
2. 제시카 외동딸 일리노이 시카고
극 중 기우와 기정이 가짜 인물 정보를 외우기 쉽도록 독도는 우리땅을 개사한 짤막한 노래를 부르는데요. 미국 관객들은 이 노래를 모르지만, 설정이 재밌었는지 아니면 손가락으로 박자를 딱딱 맞추는 두 배우의 호흡이 재밌었는지 노래가 끝나자마자 객석에서 웃음이 터져 나오더라고요. 아니나 다를까 이 노래가 "Jessica Jingle"이라는 제목으로 미국에서 화제가 되었다는 뉴스를 보았네요.
3. 새빨간 핫소스
부잣집의 도우미 아주머니를 결핵환자로 몰기 위한 작전을 수행하던 중, 결정타로 기택이 아주머니가 버린 휴지에 피를 묻히게 되죠? 이때 피를 연출하기 위해 피자집에서 구한 새빨간 핫소스를 이용합니다. 그리고서는 시치미 뚝 떼고, 나라 잃은 표정으로 피 묻은 휴지를 주인댁 사모님에게 보여줍니다. 이때 기택의 표정연기가 정말 웃겨서 저도 눈물 나게 웃고 있는 와중에 앞자리, 옆자리 미국 관객들 모두 하하 호호 킥킥 난리더라고요.
4. 강아지가 먹는 육포도 맛은 있네
빈 집에서 실컷 파티를 즐기고 있는 기택네 가족. 기정은 술안주로 열심히 육포를 뜯습니다. 그런데 실컷 먹다 문뜩 포장지를 보는데 이런, 사람 먹는 육포가 아니라 견공들의 간식이었네요. 나지막이 욕지거리를 내뱉는 기정. 그 장면에서 관객들이 어찌나 웃던지요.
5. 절묘한 발차기
문광이 "사모님~"을 외치며 지하실에서 올라오려던 순간, 충숙이 기막힌 타이밍의 발차기를 시전 하여 위기를 모면하는 장면이 있죠? 이 때도 관객들이 정말 좋아하며 웃더라고요.
이 장면 후부터 영화는 급격히 장르를 바꾸어 객석의 웃음도 잦아들었지만, 그 대신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긴장 + 몰입해서 영화를 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 역시 상영관의 불이 켜질 때까지 꼼짝 않고 앉아 있다 걸어 나오는데 연세가 지긋하신 미국 노부부께서 중얼중얼 이런 말씀을 나누시더라고요.
"진짜 웃긴데, 진짜 끔찍한 이야기네."
이 영화 전체를 설명하는 한 문장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비록 영화는 슬픈 이야기였지만, 한국영화를 집 앞 영화관에서 즐길 수 있었다는 사실에 감격한 미국 소도시 이방인의 행복한 일요일이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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