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와서야 다양한 인종을 접해 본 이방인 씨, 호기심은 인간의 본능이라고 자연히 나와 다른 黑과 白에 관심이 가더라구요. 학교에 다닌지 얼마 되지 않아서 흑과 백은 대부분 끼리끼리 어울린다는 사실을 눈치챘고, 더 살다 보니 미국에는 여전히 사회적 인종구분이 뚜렷하며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인종차별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 역시 이 땅의 소수민족이긴 하나, 노예로 끌려와 동물보다 못한 취급을 받던 세월을 지나온 흑인들과는 그 한(恨)이 다르죠. 간혹 내심 백인들을 배척하고 원망하는 듯한 흑인들을 볼 때도 있고 반대로 "우리는 억울하다"며 항변하는 백인들을 보기도 한답니다. Black도 White도 아닌 제가 느끼기엔...
옛날 그 시대, (유럽 출신이나 그들의 후손인) 백인들의 죄가 큽니다.
미국 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필수과목으로 U.S. History를 배웠는데 책의 내용을 대부분 기억 못 하는 뇌의 오작동에도 불구하고 잊을 수 없는 말이 하나 있습니다.
One-drop rule
아프리카 흑인들이 노예수송선에 실려 미국 땅으로 끌려왔던 그 옛날에 말입니다. 백인보다 열등한 인종이라 핍박하면서도 흑인 노예의 육체를 취하는 백인들이 많았었죠. 그리하여 흑백 혼혈아들이 태어났는데 처음에는 흑과 백이 반반씩 섞였겠지만 그들도 세대를 거치며 내려오는 동안 흑인의 피가 옅여지기도, 반대로 백인의 피가 옅어지기도 했습니다. 겉으로 봐서는 도무지 확실한 인종구분을 하기 힘든 사람들도 있었겠죠. 해서 당시에는 눈으로 보기에 백인에 가까우면 백인 취급을, 흑인에 가까우면 흑인 취급을 받고, 노예가 아닌 자유인 신분의 혼혈인들은 법적으로 백인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혼혈 후손들이 많아지자 백인들이 보기에 혼란스러웠던 모양이죠??? 남북전쟁이 일어나기 전부터 주(州)마다 법적 흑인을 규정하는 기준이 확립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흑인의 피가 1/8이상 섞인 이는 흑인이다" 하는 식으로요. 그리고 여기서 더 나아가 One-drop rule이라는 원칙이 생깁니다. One-drop rule이란, "한 방울이라도 흑인의 피가 섞인 이는 흑인"이라고 규정하는 룰이랍니다. 최초의 흑백 혼혈인이 백인과 결합하고, 또 그 후손들이 백인과 결합하여 겉으로 보기에 흑인보다 백인에 가깝더라도 조상 중에 한 명이라도 흑인이 있다면 자동으로 흑인으로 정의내려진다는 말이죠. 그래서 이 법칙을 "Invisible Blackness" (보이지 않는 검음)라고도 합니다. 불문율로 존재했던 이 원칙이 1910년 테네시 주에서 정식 법으로 통과된 후 루이지애나, 텍사스, 아칸소, 미시시피, 노스 캐롤라이나, 버지니아, 앨라배마, 조지아, 오클라호마 주가 줄줄이 뒤를 따릅니다. 플로리다, 인디애나, 켄터키, 매릴랜드, 미주리, 네브라스카, 노스 다코타, 유타 등의 다른 주들은 1/8 혹은 1/16 심지어 1/32 룰을 그대로 고수했고 1925년 즈음에는 거의 모든 주에 One-drop rule 또는 변형된 형태의 흑인 규정법이 존재했다고 하네요.
1/32의 흑인 피라면...
최초 흑인의 아들 (1/2)의 아들(1/4)의 아들(1/8)의 아들(1/16)의 아들(1/32)이라는 뜻이잖아요?
1925년이면 지금보다 고작 89년 전인데 법으로 "백인이 될 수 없는 사람 (cannot pass as "White")을 규정했다니 놀라운 일 아닙니까. 더군다나 1789년에 세계 최초로 대통령을 선출하고, 1848년부터 여성 투표권을 위한 투쟁이 시작되어 1869년, 드디어 와이오밍 주에서 여성에게 합법적 투표권이 부여된 나라가 미국이란 것을 생각하면 흑인 차별의 지독함을 알 수 있습니다.
학습된 우월감/열등감
하얀 인종이 태생적으로 우월하다는 당시의 지배적 세계관에 저항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을 것입니다. 상당수의 흑인들은 학습된 열등감을, 반대로 백인들은 학습된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죠.
신대륙으로 이주한 유러피안 백인들과 흑인들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과 그 후손들에게 각각의 명칭이 있었다는 사실, 알고 계십니까?
흑인 + 백인 = Mulatto, 물라토 (혼혈이라는 뜻)
물라토 + 백인= Quadroon, 콰드룬 (1/4 흑인 피라는 뜻)
콰드룬 + 백인= Octoroon, 옥토룬 (1/8 흑인 피라는 뜻)
흑인 + 물라토 = Griffe, 그리프 (3/4 흑인 피)
백인들은 물론이고 흑인들 사이에서도 조금이라도 하얀 피부를 가진 사람이 자신보다 어두운 피부를 가진 이를 멸시했다고 합니다. 요컨대 옥토룬이 콰드룬을, 콰드룬은 물라토를, 물라토는 그리프를, 마지막으로 그리프는 순수 흑인을 열등하다 여겼다는 것이죠. 백인들에 의해 강제 주입된 인종 서열 정리의 결과였을 것입니다. 슬픈 일이라고 할 수 밖에요.
Hypodescent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Halle Berry에게는 딸이 하나 있습니다. French-Canadian 백인인 Gabriel Aubrey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죠.
Nahla라는 이름이랍니다.
Halle Berry가 흑백 혼혈이고 Gabriel Aubrey가 백인이니 Nahla는 생물학적으로 따지면 3/4 백인입니다. 하지만 2011년 Halle Berry가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말하길,
난 딸에게 label을 붙이지 않을 거예요.
나는 스스로 정체성을 결정해야 했고 아마 딸도 이 세계에서 자신을 스스로 정의해야 하겠죠.
하지만 그건 이 세상이, 사람들이 그 애를 어떻게 보느냐에 많은 영향을 받을 거예요.
나도 그랬거든요. 그런데 내가 느끼기에 딸은 흑인인 것 같아요. ("But I feel like she's black.")
Halle Berry도 반은 백인이고 그녀의 딸은 흑인보다 백인의 피가 두 배 이상 섞인 아이인데 왜 Black이라고 느낀다는 것일까요? 그녀의 말처럼 이 세상이, 사람들이 혼혈아들을 보는 시선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Hypodescent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Hypo-는 '~보다 아래' 라는 뜻이고 descent는 '자손, 후손'이라는 단어로, "두 인종의 결합으로 태어난 사람을 부모의 인종 중 사회적으로 경시되는 쪽에 포함시키는 관행"을 말합니다. 아무리 백인의 피가 더 많이 흐른다 해도 흑인과의 혼혈아는 사회적으로 낮은 위치에 있는 흑인으로 규정해버린다는 거죠. 노예 시대에 생겨났다는 Hypodescent의 이유는 크게 보아 세 가지일 겁니다.
1. 흑인의 DNA가 우성이라 눈에 보이게 드러나는 형질이 많아 흑인에 더 가깝게 보여서. (생물학적 우성이란 더 우월하다는 뜻이 아니라 겉으로 드러나게 (phenotype) 유전된다는 것이죠?)
2. 백인이 소수일수록 우월한 인종으로서의 권위가 커지는 법이라서.
3. "노비의 자식도 노비가 된다"던 조선 시대처럼 흑인 노예들을 대대로 부리기 위해서.
Slave와 Master가 존재하지 않는 현대에는 아마도 1번 이유가 절대적이지 않을까 합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힘들잖아요. 실제로 Halle Berry나 Obama 대통령은 흑백 혼혈이지만 세상은 그들을 "흑인"으로 규정하죠. Halle Berry에게는 "흑인 여성 최초의 오스카상 수상자"라는 타이틀이 따라 다니고, Obama 대통령은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라 불리잖아요? "스스로를 정의내릴 때 세상의 인식이 영향을 미친다"는 Halle Berry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무리 "난 놈"이라도 세상이 자유롭게 해 주기 전에 스스로 부수고 나오는 건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니겠지요. 저 역시 미국에 살고 있는 非백인계 소수민족으로서 타인종/민족을 어떤 이유로든 정의내리고 속박하지 않는 것이 곧 나를 자유케하는 일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헛~! 오늘은 쓰다 보니 어마무지하게 길어졌군요!
이런~ 이런~ 부디 지루해서 하품한 독자가 없길 바라며...
모두 신나는 하루 유후~!
※ 이 글의 진의를 파악 못 하고 무분별하게 현재의 백인들을 공격하는 방문객은 물~론 없겠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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