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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ything & Everything

[유럽여행]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 직접 본 그 날을 잊지 못해

by 이방인 씨 2013. 10. 22.

모두가 잊고 있을 때 허를 찌르며 다시 돌아온 유럽여행기입니다.
베니스에서 기차를 타고 두 시간 후 도착한 곳은 패션의 도시 밀라노입니다.
전세계 패션피플들이 컬렉션을 보러 모여들고 유명한 갤러리아가 있는 곳이지만 저의 목적은 단 하나 뿐입니다.

최후의 만찬

레오나르도 다 빈치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는 프레스코화가 밀라노에 있습니다.
이미 베니스에서 오전 시간을 보냈고 내일 아침에는 스위스행이 계획되어있었기 때문에 제가 밀라노에서 머물 수 있는 시간은 오직 반나절 뿐이었습니다.
밀라노역의 코인 락커에 짐을 보관시켜놓고 숙소를 구하기도 전에 작품을 보러 달려갔습니다.
<최후의 만찬>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후원자였던 밀라노 공작 루도비코 스포르자가 산타 마리아 델라 그라치에 수도원을 위해 주문한 작품으로 1495년에 착수하여 1498년에 완성된 벽화입니다.

 

산타 마리아 델라 그라치에 수도원

 

이 수도원의 식당 벽에 그려져 있는 최후의 만찬은 워낙 보존보호가 중요한 작품이라 한 번에 25명씩 조를 짜서 단 15분만 관람할 수 있습니다.
가이드북을 보니 워낙 귀하신 몸이라 미리 예약을 하지 않으면 관람할 수가 없다고 써 있네요.


응?? 난 예약이고 뭐고 그냥 가자마자 바로 25명 속에 슥~ 포함되서 구경했는데??

느낌표

요즘에는 무려 한 달 전에 예약을 해야 한다고 하는데 제가 갔던 그 날 그 시각에 예약자가 정원 25명을 다 채우지 않은 덕분에 무사히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저는 아마 그 날 최후의 만찬을 볼 운명이었나 봅니다.

 

15분 단위로 시간이 정해져 있는 티켓입니다.
19:00시면 문을 닫는데 아마 폐장이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 갔기 때문에 자리가 있었나 봐요.

 

25명으로 짜여진 한 팀이 15분간 구경을 하고 나오면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다음 팀을 들여보내기 때문에 18:15분 티켓을 18:16분에 구입한 저는 운수대통이었는지 기다리지도 않고 곧바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유럽에서 입장했던 그 어떤 곳보다도 절차가 까다롭더군요.
사진이 있으면 좋으련만 이 곳에서부터는 그 어떤 사진도 찍을 수 없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몰래 찍다가 걸려도 잠시 카메라를 압수당하거나 관계자들의 분노를 사는 정도라고 하는데 여기서는 찍다가 걸리면 그야말로 엄~청난 처벌을 받게 되니 아예 상상도 하지 말라고 하더군요.

25명이 대충 줄을 맞춰 서면 직원의 안내로 식당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두 개의 문을 통과해야 했습니다.
하나는 유리문이고 다른 하나는 철창문이었는데 어느 것이 먼저였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나네요.
어쨌든 두 개의 문을 통과한 뒤 드디어 식당 안으로 들어섰는데 그 후의 15분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신비한 체험이었답니다.

식당 안은 어두컴컴하지만 벽화를 볼 수 있을 정도의 빛은 들어옵니다.

 

그림 설명을 간략하게 할 테니 지루하신 분들은 이 부분을 살짝 넘기셔도 좋겠습니다.

<최후의 만찬>은 예수가 로마군에 체포되기 전날 밤, 12명의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저녁 식사를 하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입니다.
평생 기하학을 사랑하여 균형과 비례를 중요하게 생각했던 다 빈치는 12명의 제자를 각각 6명씩 예수의 좌우로 나눠 배치하고 셋씩 무리지어 네 개의 그룹을 만들었습니다.
그림 왼쪽부터 Bartholomew, James (the younger), Andrew, Judas, Peter, John, Jesus, Thomas, James (the elder), Philip, Matthew, Jude, Simon 입니다.
예수의 자세는 삼각형 구도로 화면 정중앙의 비례중심이 되고 있는데 그 삼각형과 그림 후방의 창문 3개는 삼위일체를 의미한다는 설도 있습니다.
또한 다 빈치의 주특기였던 원근법을 활용하여 식당 벽에 또 하나의 입체적 식당을 완성해냈죠.

제자들과 마지막 저녁 식사를 하면서 예수께서 "너희 중 하나가 나를 배반할 것이다."라는 말씀을 던진 순간의 반응을 그렸기 때문에 제자들의 제스쳐가 드라마틱합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오, 지금 예수께서 뭐라고 하신 거야?!!' '한 명이 배신할 거라구요?' '저는 아니예요!' 등등 다양한 추측이 가능한 모습들입니다.
아시다시피 열 두 제자 중 예수를 배신한 자는 가롯 유다 (Judas)였죠?
그림 왼쪽에서 네번째 얼굴인 유다는 몸을 예수로부터 뒤로 빼고 앉아있고 오른손에는 돈주머니를 들고 있는데 이는 유다가 은 30냥에 예수를 팔아넘긴 것을 의미합니다.
유다의 얼굴에 대한 전설적 후일담이 많은데 다 빈치가 예수를 배반한 자의 얼굴을 어떻게 그려야할지 고민을 거듭하고 있을 때 빨리 그림을 완성하라고 매일 닦달을 해대는 수도원 원장의 얼굴을 그려넣었다고도 하고 또 길거리에서 얼굴이 아름다운 청년을 보고 그를 예수의 얼굴 모델로 쓰고 몇 년 후 이번엔 거리에서 악한 범죄자의 얼굴을 보고 유다의 얼굴을 그렸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둘이 동일인물이었다는, 착하게 살아야 미모가 유지된다는 교훈적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세로 4.6미터 가로 8.8미터의 크기로 벽 윗부분을 가득 채운 대작이라 적당히 뒤로 물러서서 그림을 감상하게 됩니다.
웹에서 구할 수 있는 사진들처럼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데 손상을 막기 위해 원래 있던 창문을 벽돌로 막아 채광을 조절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는군요.
이 그림은 다 빈치의 작품 중에서 가장 손상 정도가 심한데 산전수전에 더해 실제 전쟁까지 겪은 탓입니다.
작품은 벽에 회반죽을 바른 뒤 마르기 전에 물에 안료를 개어 그림을 그리는 프레스코(Fresco)기법으로 그려졌는데 회반죽이 마르기 전에 그림을 완성해야 했기 때문에 수준 높은 기술이 요구되지만 대신 보존성이 높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술가이기면서 동시에 타고난 과학자였던 다 빈치는 실험정신이 투철하여 이 벽화를 그릴 때 당시 보편적으로 사용되던 안료 대신 자신이 직접 고안한 새로운 안료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다 빈치의 화학실험의 결과는???

다 빈치가 살아있을 무렵부터 안료가 상하기 시작했고 (어떤 자료를 보면 그림이 채 완성되기도 전에 먼저 그린 부분에서 안료가 변색되자 다 빈치가 무척 싫증을 내고 의욕을 잃었다고도 합니다.) 1498년에 완성된 작품이 60년도 못 버티고 1556년에 이미 표면이 잘게 부스러지는 손상이 진행 중이었다고 하니 새로운 안료 실험은 실패였다고 봐야겠죠?

1652년에는 수도원의 수도사들이 식당과 주방으로 통하는 문을 넓히기 위해 벽을 뚫는 바람에 그림 하단에 문짝이 뻥 뚤리고 말았습니다.
위 그림을 보면 예수님이 앉아 계신 식탁 아래 부분에 뜬금없는 사각형 자국이 있죠?
그게 바로 문을 만들었다가 나중에 다시 막은 흔적이랍니다.

아이 나 참~ 수도하는 와중에도 먹고 사는 건 중요하니까 주방으로 통하는 문을 뚫은 걸 탓할 순 없죠.

여기까지만 했어도 좋으련만, 제 2차 세계대전 중에 수도원이 폭격을 당하는 바람에 그림은 손 쓸 수도 없을 만큼 훼손되었습니다.

 

(en.Wikipedia.org)

당시 사진입니다.
오른쪽 벽에 보호막을 쳐 놓은 곳 안에 벽화가 있었다고 합니다.

 

1978년부터 무려 21년간 대대적인 복구를 거친 뒤 1999년 벽화는 다시 일반에게 공개됐지만 아까 말한대로 엄격한 통제하에 관람을 허용하고 있습니다.
복구를 하면서 원작의 색상을 잃었다는 지적과 옷의 주름들도 형편없이 그렸다는 비판에 시달렸지만 그거야 복구되기 전의 원작을 볼 수 있었던 선택받은 사람들의 불평이겠죠.
게다가 그들이 봤다고 믿는 그 원작이라는 것도 다 빈치 시대보다 적어도 400년의 후의 모습이고 그 사이 중세 미술가들의 어설픈 복구 시도가 있었다고 하니 진.짜. 원작을 본 사람들은 다 빈치의 동시대 사람들 뿐이지 않을까요?
제가 본 벽화 또한 원작과 많이 다른 모습일 수 있으나 그건 중요치 않았답니다.

인류 역사상 최고의 천재라고 불리는 사람의 걸작 앞에 서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초현실적 체험이었거든요.

로마에서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를 직접 봤을 때도, 우피치에서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을 직접 봤을 때도, 그리고 나중에 루브르 박물관에서 다 빈치의 또 다른 명작 <모나리자>를 봤을 때도 이런 느낌은 들지 않았는데 유독 이 작품만 이렇게 큰 동요를 불러일으키는 이유가 뭘까 곰곰히 생각해 보았답니다.
그리고 세 가지 결론을 내렸습니다.

1. 공간의 분위기

들어가는 절차부터 까다롭고 엄격하기 때문에 두근두근 약간 긴장한 상태로 걸어가다가 어둑한 식당 안으로 들어서서 마침내 벽을 가득 메운 그림이 눈 앞에 보이면 그야말로 감성의 Climax에 도달하게 됩니다.
어슴푸레한 공간이다보니 시각적 신비감이 배가되면서 그림이 가지고 있는 수많은 전설들이 머리속에서 마구 극대화되는 거죠.

2. 손상된 그림

매우 역설적이게도 그림이 많이 손상됐기 때문에 감동스러운 면이 있었습니다.
그만큼 역사적이라는 뜻이기도 하니까요.
부셔져내릴 위기도 있었고, 건물이 폭격을 당하기도 했고, 더욱이 앞으로도 어떤 손상이 있을지 모르는 그림을 지금 이 순간 보고 있다는 사실이 인생의 커다란 행운으로 느껴졌습니다.

3. 관람객들의 태도

저 뿐만 아니라 다른 관람객들도 위의 두 가지 이유로 혹은 저마다의 이유로 엄숙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일단 식당 안에 들어가면 한 5분 정도는 그저 고~요합니다.
일순간 압도당한 사람들이 아무 말도 안 하고 가만히 서서 그림만 보고 있거든요.
그러다 나중에 들려오는 말들도 아주 작은 속삭임일 뿐 누구 하나 큰 목소리를 내지 않습니다.
다른 박물관이나 미술관은 사람들로 북적이는 시장통 같은 느낌이 있는데 이 곳은 성스러웠어요.


다 빈치를 영접하는 15분이 흘러가버리고 밖으로 나와도 한동안은 꿈을 꾼 듯한 몽롱한 기분마저 들었습니다.

이건 제가 평소 르네상스 미술과 그에 얽힌 전설들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그랬을 수 있으니
제 말만 듣고 보러 가셔서 '이게 뭐야?'하고 실망하셔도 책임 못 집니다.

배째


패션에도, 그림에도 관심이 없는 사람이 밀라노를 찾았다면 이유는 아마 둘 중 하나일 것입니다.

라 스칼라 혹은 두오모

라 스칼라는 세계 3대 오페라 극장 중의 하나인 Teatro alla Scala를 말하는데 오페라에는 영~ 관심이 없는 저는 So So Cool하게 생략했습니다.

 

(commons.wikipedia.org)

이게 바로 라 스칼라 오페라 극장입니다.

 

하지만 밀라노의 그 아름답다는 두오모는 놓칠 수 없어 달려갔는데 최후의 만찬을 예약없이 보느라 제가 가진 운을 다 써버린 모양인지 두오모가 공사중이지 뭡니까.
수 백년된 건물들이 많은 유럽 전역은 어딜가나 공사중인 곳이 많았는데 하필이면 전면에 천을 씌워놓아서 고작 이런 옆모습만 볼 수 있었답니다.

 

 

본래는 이렇게 아름다운 순백의 두오모인데 저는 곁눈질만 하다가 온 셈이죠.

 

이렇게 멋진 정면은 천막을 씌워놔서 하나도 못 봤어요.

 

그래도 최후의 만찬을 본 것만으도 행복한 마음으로 밀라노에서 밤을 보내고 다음날 아침 스위스 제네바로 떠났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탈리아에서의 여정이 모두 끝났네요.
저는 여행 중 이탈리아에서 가장 즐거웠는데 여행기를 읽은 여러분은 어떠셨는지요?
다음편에서 뻐꾸기 시계가 우는 집에서 하이디가 요들송 부르며 요거트 먹는 스위스 이야기로 돌아올게요.

여러분,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추신 - 아차차, 최후의 만찬의 맞은 편 벽에도 그만한 크기의 또 다른 벽화가 그려져 있는데 누구의 어떤 작품이었는지 전~혀 기억이 안나요. 그것도 중세시대 그림이라고 한 것 같은데, 오래전에 돌아가신 작가 분께 죄송하지만 15분간 최후의 만찬만 보느라 반대쪽 그림을 눈여겨 본 관람객이 많지는 않을 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