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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lcome to California

한국인인 내가 미국인에게 영어 과외한 사연

by 이방인 씨 2012. 12. 14.

정말입니다.
진짜예요.
제가 커뮤니티 컬리지에서 문화 교양 강좌 들을 때 일이랍니다.
4명씩 앉을 수 있는 큰 책상에서 수업을 했었는데 그 날은 심심풀이로 릴레이 글짓기를 했어요.
제 옆에는 19살 정도 된 미국 남학생이 앉아 있었는데 본인 차례가 되서 몇 자 적더니 갑자기 절 보고 묻는 거예요.

 

니스 (조카딸) 스펠링이 어떻게 되지?

 

여자 조카를 뜻하는 단어 niece 의 스펠링을 몰라서 제게 물은 것입니다.
조금 어이없으려다말고 N.I.E.C.E 라고 말해주자 다시 한번 묻네요.

 

가운데 E 가 들어가는 거 확실해?

아놔~~ 이 녀석이 나를 뭘로 보고... 마

 

아이구~ 학생, 가운데 E 가 빠지면 Nice 가 되는 거라우.

 

했더니 그제서야 "Thank you" 하고 글짓기를 계속하더라구요.

여러분은 지금 19살이나 된 성인이 어째서 저런 간단한 단어의 철자조차 모르는 걸까 의아해하실 수 있지만 미국 사정은 조금 다르답니다.
미국에는 NAAL 이라는 것이 있는데 National Assessment of Adult Literacy의 약자로 문자를 읽고 쓸 수 있는 성인이 얼마나 되는지 평가하는 것이랍니다.
NAAL의 조사에 따르면 미국 성인의 14%가 읽고 쓰는데 심각한 어려움을 느낀다고 합니다.
이들은 본인의 이름과 간단한 몇 가지 단어를 쓸 수 있는게 전부라고 하네요.
게다가 49.6%나 되는 미국인들이 읽고 쓰는 능력이 Low에 속하고 겨우 19%만이 High 평가를 받았습니다.

 

 

Functional Illiteracy (실제적 문맹) 으로 넘어가면 상황은 더 심각해집니다.
단순히 활자를 읽고 쓰는 것만이 아니라 글을 읽고 그 뜻을 제대로 파악하고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은 더 부족하다는 뜻이죠.
미전역 평균으로 봤을 때 전체 성인의 7% 그리고 고교졸업생의 20%가 Functional 문맹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아까 제가 말씀드린 19살 남학생은 아마도 그 20%에 속했었나 봅니다.



 

 

이렇게 미국의 문맹률이 (한국과 비교하여) 높은 이유는 영어가 그리 합리적 문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계적으로 문맹률이 낮은 나라에 속하는 한국은 한글이라는 탁월한 원리의 문자를 쓰지만 미국인들은 그런 천운이 없었다고나 할까요. ^^;;
문자와 소리가 정확히 일치하는 한글과 달리 영어는 철자만 보고 발음을 유추해내기 어려운 단어들이나 반대로 소리만 듣고 철자를 유추해내기 어려운 단어들이 수두룩하죠.
예를 들어 아까 그 남학생이 물어본 단어 Niece만 하더라도 니스라는 단어의 소리만 들으면 neece, nice, nece 도 모두 후보군에 오를 수 있는 철자들이니까요.
두번째 이유는 아마도 미국의 낮은 교육기준일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공부를 많이 시키지 않는 나라로 유명하잖습니까.

어쨌든 그 남학생이 글짓기를 마치고, 종이가 제게로 넘어왔는데 읽어보니 이건 뭐... 아휴~ 나오느니 한숨이었습니다.

너 진짜 미쿡인 맞습니까요?

할 정도로 엉망진창 작문실력 때문이었죠.
스펠링이 틀린 것은 양반이라고 할 정도로 앞 뒤 말은 하나도 안 맞고 심지어 You are 를 축약하면 You're 가 되어야 하는데 그걸 your 라고 적었더라구요.
4명이 한 조가 되어서 내는 과제니까 그냥 놔 둘 수 없겠다 싶어서 넌지시 틀린 부분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여차저차해서 다 수정하고 과제를 제출하고 나자 그 남학생 제게 말하더군요.

 

너 작문 잘하는구나.

으음... 입은 삐뚤어져도 말은 바로 하랬다고... 외국출신인 내가 잘해봤자 얼마나 잘하겠니.
내가 잘하는 게 아니라 너님이 못하시는 거란다...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 아이의 가슴에 대못을 박을 수는 없으니 그냥 애매하게 웃고 말았죠.
그리고 그 날부터 저는 강제적으로 무료 과외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 아이가 다른 수업의 과제까지 제게 들고 오는 거예요!!
말은 맨날 "틀린 거 있나 조금만 봐줘" 였지만 막상 뚜껑 열어보면 저도 모르게 검정펜 선생님으로 둔갑하게 되더라구요.

 

이 녀석... 너 고등학교 졸업장 좀 내놔봐라.
어떤 학교에서 너를 졸업시켰는지 인류의 미래를 위해 응징하러 가야겠다!  못써

 

그렇게 한 3개월여를 영어 나머지 공부 도우미 노릇을 했는데 그 아이의 실력이 일취월장했다면 정말 영화같은 감동 스토리에 가까웠겠지만 현실은...
가르쳐주면 그 때 뿐이고 다음번에 보면 또 엉망이에요. ㅠ_ㅠ
과제 낼 때만 제게 도움을 받고 공부는 영~ 안 하는건지, 아니면 제가 형편없이 가르쳤는지 어쨌든 처음과 끝이 그다지 변함없는 진득한 녀석이었답니다. ^^;;

이런 일을 겪으면서 정말 다시 한번 세종대왕님께 엎드려 감사했지요.
세종대왕님의 위대함과 은혜로움은 외국에 나와보면 더 뼈저리게 느끼게 되더라구요.
전세계 공용문자가 한글이었으면 좋겠다는 상상까지 해보게 됩니다. ㅎㅎㅎ

지금 여러분과 제가 이렇게 소중한 문자로 의사소통을 한다는 것도 크나큰 행운인 것 같습니다.
모두 좋은 하루 보내세요~

* 오해하실까봐 덧붙이자면 미국의 문맹률은 한국보다는 높지만 전세계를 기준으로 보면 낮은 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