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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lcome to California

에이즈 환자 두 명과 마주 앉아있었던 진기한 경험

by 이방인 씨 2012. 12. 2.

오늘은 이곳 날짜로 12월 1일이랍니다.
느긋한 토요일 아침을 맞고 있는데 문뜩 생각하니 오늘이 바로 그 날이네요.


 

 

 

매년 12월 1일은 세계 에이즈의 날이랍니다.
아마 알고 계셨던 분들이 많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되는데요.
저 역시 오늘 이야기해 드릴 이 사건이 없었다면 아마 영원히 모르고 살았을 것 같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 부지불식간에 일어난 일이랍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위한 필수 과목으로 Health Education 이란 것이 있었는데 건강/보건 교육쯤 될 것 같습니다.
기본적인 보건 교육을 비롯해서 성교육 역시 이 수업시간에 포함되어 있었죠.
이 수업의 선생님은 유독 외부 초청강사를 자주 부르곤 하셨는데 그 날도 왠 낯선 사람 2명이 칠판 앞 의자에 앉아 있더라구요.
Very Special Guests 를 모셨다고 하길래 어디서 온 사람들인가 하고 있는데 남자의 입에서 나온 첫 마디가

 

Hi, my name is Brian and I have AIDS.  안녕하세요? 내 이름은 브라이언이고 난 에이즈 환자입니다.

 

응?  뭥미방금 내가 무슨 소리를 들은거지??

뭘 Have 하고 있다고???  AIDS를 have 하고 있다고라???? 따~와~앗~~~~!!!

 

당시 만으로 17살이었던, 게다가 AIDS란 질병이 생소한 한국출신이었던 저의 충격을 한번 상상해보십시오.
너무 놀라서 오히려 무표정한 얼굴로 가만히 앉아 있는데 그 옆의 여자분도 인사를 건넵니다.

 

Hi, I'm Tina. I also have AIDS. 안녕하세요? 내 이름은 티나고 역시 에이즈 환자예요.

 

아아아.... 하나도 아니고 둘씩이나 그것도 바로 내 앞에...
나는 왜 오늘따라 모범생 코스프레를 한답시고 맨 앞 자리에 앉았을까... 

그 당시 제가 AIDS에 관해 알고 있었던 거라고는 탐 행크스의 명연기가 빛났던 영화 필라델피아에 묘사된 것이 전부였습니다.
몸에 울긋불긋 반점이 생기는 끔찍한 병이고 전염된다는 것만 알고 있었죠.

전염병인데 내가 제일 가까운 거리에..... 엉엉
속으로는 떨렸지만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브라이언이 말을 시작하더라구요.

 

15년의 생존자 Brian

에이즈 환자라는 첫 마디도 충격적이었지만 에이즈에 걸리면 금방 사망에 이른다고 지레 짐작하고 있었던 제게 15년간 투병중이라는 브라이언의 말은 더욱 놀라웠습니다.
그는 샌프란시스코 게이 밀집지역에 살고 있는 동성애자였는데 80년대 중반에 본인이 에이즈에 걸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15년전에 HIV 바이러스에 감염됐고 약 7년후 에이즈가 발병했습니다.
검사 결과를 받아들고 가장 먼저 한 일은 그의 파트너에게 사실을 털어놓는 것이었죠.
"내가 에이즈에 감염됐으니 너도 빨리 검사를 받아봐라" 하니 잠시 적막이 흐른 뒤 이런 대답을 했다는군요.

 

네가 걸렸으면 나도 걸린거지. 굳이 검사를 받아서 뭐하겠어. 그걸로 됐어.

 

그리고 그 둘은 그 후 15년이 지나도록 계속 연인사이로 지내고 있었습니다.
브라이언은 곧 치료를 받기 시작했고 지금까지 한 번에 무려 26알의 약을 먹는 생활을 15년째 해오고 있었지만 건강하게 생존하고 있다고 이야기를 마쳤습니다.

 

두려움 없는 사랑이었을까? Tina

앞서 사연을 털어놓은 브라이언은 당시 이미 40대 중반이었지만 티나는 고작 23살이었답니다.
그리고 그녀가 에이즈에 걸린 사연은 정말.... 어이가 없었죠.
그녀는 21살에 한 남자를 알게 됐는데 얼마 지나지않아 사랑에 빠졌다고 합니다.
티나가 남자에게 사랑을 고백했을 때, 남자가 거절하며 에이즈에 걸렸노라 고백을 했다네요.
보통 상식으로는, 안타깝지만 여기서 사랑은 끝나고 눈물 고인 눈으로 이별을 고했어야 했겠지요.
하지만 용감했던건지 어리석었던건지 티나는 포기하지 않고 남자를 쫒아다녔습니다.


그리고는........ HIV에 전염됐죠.
그리고는........ 그 남자랑 헤어졌죠.
그리고는........ 혼자 2년째 투병중이죠.


브라이언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슬며시 눈물이 나려고도 했는데 티나가 말을 끝냈을 때는 제가 너무 어렸던지라 이런 생각도 들더라구요.

생각이 짧으면 몸이 고생한다는 말은 진리였구나.... 그랬구나


하지만 그 날 브라이언과 티나가 어렵게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준 건 동정받기 위해서도 비난받기 위해서도 아니었습니다.
에이즈 환자들에 대한 편견과 차별을 타파하고자 에이즈에 관한 올바른 상식을 가르쳐주러 왔던 것이죠.

 

1. 에이즈는 동성애자들만의 질병이 아닙니다. 

7,80년대에 에이즈는 Gay disease 라고 불리는 등, 동성애자들만의 질병으로 오해받았었지만 사실은 누구나 에이즈에 감염될 수 있고, 심지어 에이즈에 걸린 어머니 때문에 에이즈 환자로 세상에 태어나는 신생아들도 있습니다.


2. 에이즈는 막무가내로 전염되지 않습니다.

제가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고 두려워했던 것처럼 에이즈의 전염성에 대해 공포심을 가지고 계신 분들이 많을텐데요.
에이즈는 체액 (혈액, 정액, 모유) 의 직접적인 접촉으로만 전염됩니다.
모유수유, protection을 사용하지 않는 성관계, 보균자의 혈액이 닿은 주사바늘 등이 전염의 원인이고, 단순한 신체접촉으로는 전염되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피부에 난 작은 상처를 통해서도 체액의 접촉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무서운 일이기는 하죠.
하지만 에이즈 환자와 같은 공간에서 숨을 쉰다거나 악수를 한다고 전염되는 것은 아니니 그들을 죽음의 질병을 옮기는 존재 취급할 이유는 없다는 것입니다.


3. 감염 후에도 바로 에이즈가 발병하는 것은 아닙니다.

에이즈란 질병을 일으키는 것은 HIV 라고 하는 바이러스죠.
Human Immunodeficiency Virus 가 그것인데 사람의 면역체계를 무너뜨립니다.
그래서 걸리는 병이 바로 Acquired Immune Deficiency Syndrome, 후천성 면역결핍증이죠.

HIV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잠복기를 거친 후 에이즈가 발병하게 되는데 그 시기는 사람마다 모두 다르지만 약 60% 정도는 감염 후 3-4년이 지나면 에이즈가 발병하고 2-3%는 감염 후 몇주에서 몇개월내에 발병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33% 정도의 바이러스 감염자가 무려 10-15년의 잠복기를 가집니다.
이 말은 곧, HIV에 감염되고 15년이 지나도록 발병하지 않을 확률도 1/3이나 된다는 것이죠.

HIV 감염 사실을 알고 치료를 일찍 시작할수록 에이즈 발병시기를 늦출 수 있다고 합니다.
대표적인 예로 NBA의 수퍼스타 Magic Johnson이 있죠?


 

그는 1991년 11월에 기자회견을 열고 HIV 감염 사실을 공개하고 NBA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만으로 21년이 지난 지금도 에이즈에 걸리지 않았죠.


4. 에이즈가 발병했다고 곧 사망하는 것도 아닙니다.

바이러스가 잠복기를 끝내고 에이즈에 이르렀다고 해도 곧 사망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에이즈에 걸려서 신체의 면역 시스템이 완전히 기능을 상실하기까지는 약 8-10년이 소요된다고 합니다.
면역력을 완전히 잃고 나면 감기 같은 가벼운 병에 걸려도 낫지 않고 사망하게 되는 것이죠.
바로 그래서 앞서 이야기한 브라이언이 한번에 약을 26알씩이나 먹어야 했던 것입니다.
사람마다 개인차가 있어서 누구나 10년 이상을 버티는 것은 아니지만 반대로 누구나 일찍 사망하는 것도 아니랍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이 조속히! 치료를 받는 것이지요.

 

이상의 4가지가 브라이언과 티나가 제게 가르쳐준 것들인데 그 당시까지 제가 알고 있던 상식을 모두 깨버리는 사실들이었죠.
그들이 학교를 돌며 이런 강연을 하고 있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저처럼 잘못된 상식을 가지고 막연한 두려움으로 HIV나 AIDS 환자를 차가운 시선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죠.
그리고 그런 시선이 투병으로 힘든 그들을 더욱 외롭고 힘들게 하는 것이겠죠.

한국 에이즈정보센터의 자료를 보면 2011년 12월까지 한국의 내국인 에이즈 환자가 8544명이더군요.
이 통계는 물론 미국이나 인도, 아프리카에 비하면 "새발의 피" 라고 까지 표현할 수 있는 숫자이긴 합니다.
헌데 공개되는 숫자보다 훨씬 많은 HIV 감염자가 있을 것이라는 짐작이 지배적이죠.
감염사실을 모르고 있을 수도 있지만, 알아도 사회적 시선 때문에 밝히지 않는 경우도 있다고 하는데요.
이것은 엄청나게 위험한 일입니다.
하루라도 빨리 치료를 시작해야하는 감염자 본인에게도 그렇지만 바이러스를 타인에게 옮기고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죠.
이런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HIV 감염 사실을 스스로 받아들이고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들이 꽁꽁 숨지 않도록 에이즈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달라져야 하겠죠.
HIV 감염자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사회적으로 매장되어 인생이 끝날까봐 불안함에 시달리며 숨어 지내는 것보다 조속히 치료를 하는 것이 훨씬 현명한 대처라는 것을 그들이 알 수 있도록 말이죠.

세계 에이즈의 날을 맞아 오래전 기억도 떠오르고 해서 수다 떨어봤습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