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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lcome to California

성폭행 피해 여성을 보는 미국인들의 다른 시각

by 이방인 씨 2012. 3. 10.

어제 웹서핑을 하던 중에 굉장히 선정적인 의상을 입은 여가수의 사진 밑에 달린 댓글들을 봤습니다.
대부분 너무 과한 요즘 한국의 가수들의 옷차림을 지적한 공감가는 댓글들이었는데요.
그런데 그 중 몇몇 제 눈길을 끄는 댓글들이 있었습니다.

 

여자들이 야한 옷 입고 다니면서, 성폭행 당하면 억울하다고 난리친다.

 

이런 요지의 댓글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어쨋든 저 댓글 덕분에 오랫동안 뵙지 못하고 살아온 미국인 선생님의 사연이 하나 떠올랐습니다.
오늘은 12년이나 지난, 그 이야기를 한 번 써보려고 합니다.

미국 고등학교에 다니기 시작한 첫 해, 긴장되는 영어과목의 선생님은 중국계 미국인 3세의 여성분이셨습니다.
우연히도 남편분이 한국계 미국인이시라 저를 비롯한 몇 명 안되는 교내의 한국 학생들에게 아주 친절하셔서 인기도 좋은 분이셨죠.
그런데 어느 날부터 장기결근을 하시더라구요.
무려 8주 동안이나 학교를 나오지 않으시다가 마침내 다시 나오셨을 때 평소보다 훨씬 수척한 모습이시기에 그 동안 어디가 아프셨나 짐작할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느낀 건 저만이 아니었는지 한 학생이 "그 동안 왜 안 나오셨어요?" 질문을 했더니 선생님의 대답이 정말 충격적입니다.

 

두달 전에 성폭행을 당했단다. 다친 몸을 치료하고 심리치료까지 받느라고 이제야 나왔네. 

 

그 때, 저는 너무 당황해서 아무말도 못하고 멍하니 있었습니다.
어떤 얼굴을 해야할지, 무슨 말을 해야할지, 머릿속이 하얗기만 하더라구요.
그도 그럴것이 한국에서는 성폭행 피해자들은 고통속에 숨어지낼 뿐, 본인이 당한 불행은 남에게 알려서는 안되는 치욕스런 비밀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성폭행 피해 여성을 보는 사회적 인식도 전혀 너그럽지 못하구요.

그런데 미국에서 공립학교 선생님이 그것도 수업시간에 본인의 성폭행 피해사실을 담담하게 아이들에게 밝히는 것을 보니 저로서는 말로 설명하기 힘든 문화 충격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연이어 받은 충격이 바로 미국 아이들의 반응이었습니다.
멍하니 눈 둘곳을 모르던 저와는 달리, 미국 아이들은 

 

이제 다시 학교에 나오실 수 있을 만큼 회복되셔서 너무 기뻐요. 몸 조리 잘 하세요.

 

그러자 선생님도 "그래 고맙다" 하시곤 다시 수업이 재개되었습니다.
그 후로도 선생님은 여전히 아이들에게 친절하고, 인기 많은 선생님으로 제가 졸업할 때까지 매일 학교에서 만났습니다.
학교 안의 어느 누구도 선생님 뒤에서 수군거리거나 선생님을 보는 눈이나 대하는 태도가 예전과 달라졌다거나 하지 않았고 선생님께서도 당당하지 못한 모습을 보이신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이 똑같은 사건, 한국에서 일어났다면 어땠을까요?
제가 굳이 글로 쓰지 않아도 여러분들이 모두 쉽게 짐작하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상황은 아주 많이 달랐겠지요.

이제 다시 최초의 댓글로 돌아가서, 야한 옷차림의 여성은 정말 성폭행을 당해도 할 말이 없는 것일까요?
야한 옷을 입은 여성이라고 한다면 한국보다 미국에 훨씬 많습니다.
예전 포스트에도 여러번 소개했듯이 헐벗고 조깅하는 여성들이라든지 공공장소에서 브래지어속에 손을 쑥 넣어 지갑을 꺼내는 여성들이라든지, 점잖은 한국분들이 보신다면 미국은 요지경이겠지요.
하지만 저는 미국에서 성폭행 범죄를 피해여성의 탓으로 돌리는 경우는 본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원인 제공자' 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치유받아야 할 '피해자' 로 인식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 고등학교 시절 선생님은 당당하게 세상에 다시 나올 수 있었던 것이죠.

이 글을 쓰려고 자료를 많이 검색했는데 한국의 정확한 성폭행 범죄율을 찾기가 힘들더군요.
여러 글들을 보니 이것은 성폭행 피해신고가 잘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또한 낮은 신고율이 성폭행 범죄자들을 더욱 대담하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고도 하구요.

성폭행 피해 여성들이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고 살아가면서도 주변의 시선이 무서워 신고도 못하고 범인은 받아 마땅한 처벌을 받지도 않는다니...같은 여성으로서 참 답답한 마음입니다.

사실 저도 뼛속부터 촌닭이라 그런지 여성이든 남성이든 공공장소에서 지나치게 자유로운 옷차림이나 행동을 보이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반대하는 입장입니다.
하지만 설령 그러한 이유로 성폭행 범죄의 표적이 되었다 하더라도 최우선시 되어야 하는 일은 피해 여성의 정신적 상처 치유와 다시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게 왜 그런 옷을 입었어?" 라는 비난이나 훈계는 그 후에 해도 늦지 않을 것 같습니다.
성폭행당하는 여성들은 옷차림이나 행동거지에 문제가 있을 것이라는 인식이 사라지지 않는 한 고통받는 피해 여성들의 마음의 상처는 치유되지 못하겠지요.

자칫 우울하게 들릴 수 있는 이야기로 아침을 시작하게 돼 죄송합니다.
그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