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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lcome to California

서민은 돈 아까워 물도 못 마시겠네, 미국의 워터 소믈리에

by 이방인 씨 2013. 8. 12.

여러분 즐거워 죽겠는 월요일 아침 보내고 계시죠?
저는 아직 일요일 아침 11시랍니다~

   이방인은 그. 입. 다.물.라.

하시는 소리가 태평양을 건너 들려 오네요.


눈치 빠르게 입은 다물고 재빠르게 손을 놀려 보겠습니다.
며칠 전에 참 황당한 소식을 들었답니다.

미국에 Water Sommelier (워터 소믈리에)가 등장했다는군요.
'소믈리에'라면 레스토랑에서 고객들께 와인을 추천하고 서빙하는 와인 전문가죠?
그런데 워터 소믈리에라니...

"아니 레스토랑 가면 메뉴판처럼 나오는 게 물인데 세상 어느 레스토랑에서 물을 추천하고 서빙한다고 워터 소믈리에가 필요하겠어? 이 양반 굶어 죽기 딱 좋겠구만!"

했는데 이게 웬일이랍니까.
세상에 워터 tasting 메뉴가 있는 식당이 있더구만요... 

남가주 L.A에는 LACMA (L.A County Museum of Art) 라고 하는 유명한 미술관이 있는데 그 안에 Ray's Stark Bar라는 식당이 하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식당의 메뉴 중에 분명히 와인도 아니고 워터 tasting 메뉴가 있단 말이죠.

 

아니, 이것 참...
고객 물 먹이는 메뉴로구만?  

 

워터 tasting이 레스토랑의 정식 메뉴라는 것도 놀랍지만 살펴 보면 그 메뉴의 '진지함'이 더 놀랍습니다.
일단 메뉴의 첫 페이지에는 이 레스토랑에서 제공하고 있는 세계 각국의 물들이 나열되어 있는데요.

 


여러분 이 많은 물들 중에서 몇 가지나 알고 계신가요?
저는 겨우 한 손으로 꼽을 수 있는 걸요.

 

메뉴판을 넘겨 보면 뭐랄까... 더 웃깁니다.

 

캐나다산 Berg라는 물은 그린랜드 서부에서 온 빙하수인데 15,000년 된 빙산에서 나왔다네요.
사람 손이 닿지 않은 물로서 미네랄도 거의 없답니다.

성분표와 함께 가격이 써 있는데 0.75리터에 $20 (한화 2만 2천원)입니다.
오른쪽 상단에는 Sweet - Salty, Smooth - Complex 라고 맛의 스케일도 있네요.

Berg가 20가지의 물 중 가장 비쌌는데 역시 '15,000년 된 빈티지 중의 빈티지 빙하수'라 그런 모양입니다.

 

 


그 다음으로 비싼 물이 미국산 Beverly Hills 90H20인데 가격은 1리터에 $16 (한화 1만 7천원)입니다.

제가 예전에 90210는 베벌리 힐스 지역의 우편번호로
미국에서 이 우편번호를 가진 주소에 사는 것은 곧 상류층의 상징이라고 말씀드렸죠?
베벌리 힐스 90H20라는 이름을 붙인 걸 보니 고가의 물 답게 귀족 마케팅을 하고 있는 걸 알 수 있네요.

제품 설명에 보면 마치 샴페인을 만드는 것처럼 맛을 즐기기 위해 특별히 만든 물이라는군요.
북가주 지역의 천연 샘물과 미네랄을 적절히 배합해서 만들었답니다.
pH 7.5를 만든 물로서 실크처럼 부드럽고 상쾌한 맛이래요...

아따~ 이거야 원 진짜로 먹어보지 않고는 죽어도 모를 맛이구만.


거기서 끝이 아니라 "디자이너 워터"의 기품을 지키고자
10,000개씩 넘버가 붙여진 "다이아몬드 같은" 유리병에 담겨 시판된답니다.

"다이아몬드 같은" 유리병이라니...

그래 그래, X도 잘못 보면 된장 같을 때가 꼭 있긴 있더라마는.

 

 


몸값 비싼 물들이라 그런지 물병 디자인이 볼만 하긴 하더군요.
노르웨이산 Voss라는 물이 디자인과 물을 접목한 최초의 제품 중 하나라고 합니다.
물병이라기보다 향수병이나 남성용 스킨병 같다고 생각했더니 역시나!
켈빈 클라인의 디자인실장이었던 Neil Kraft의 디자인이랍니다.
물이 그저 마시는 물이 아니라 "라이프스타일 초이스"가 되게 해 준 작품이라는군요.

Lifestyle Choice라...
물 파는 사람들이라 그런지 말이 청산유수예요.

 

말재주는 참 좋은데 제 귀와 마음에는 전혀 와닿지 않는군요.
이제 물도 기호에 따라 사 먹는 시대이기도 하고 새벽마다 산에 가서 약수 떠 먹는 거나 예쁜 병에 들은 비싼 물을 사 먹는 거나 매한가지로 개인의 선택이라고 할 수 있죠.
하지만 '이런 것이 고급 인생이다'라는 식의 마케팅은 참 불편하지 않나요?
깨끗한 물 한 잔을 마실 수 없어 매일 아이들이 죽는다는 아프리카 이야기를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말이죠.
자유국가 좋고, 시장경제 좋고, 상업주의 다 좋지만 워터 소믈리에 (과연 이것도 자격증이 있는지, 공인을 받은 건지 알 수도 없지만)를 내세워 물 메뉴를 내놓는 이런 사람은 도대체 어디까지 할 생각일까요?
그리고 귀족 마케팅에 혹하는 사람들은 또 어디까지 따라갈 작정일까요?

오늘은 여기서 물러갑니다.
값은 싸도 맛만 좋은 우리집 물로 이 씁쓸함을 헹궈내야겠어요.

 

여러분 활기찬 월요일 시작하세요.

깨끗한 물을 마실 수 있음에 감사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