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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lcome to California

생애 최초로 미국 배심원 소환을 경험한 날의 기록

by 이방인 씨 2014. 1. 3.

어제 서론만 쓰고 말았더니 뒷 이야기를 궁금해하신 분들이 참 많았습니다.
저는 그저 글이 너무 길~게 늘어질까 봐 편리한 지점에서 나눈 것 뿐인데 결과적으로 방문객들을 안달나게 하는 밀당효과가! 있었군요.

오호~! 이방인 씨 흥미유발 작전 성공??!

 

그렇다면 지체말고 본론을 시작하겠습니다~

오라고 한 날짜에 지각을 한 것도 아니고 아예 안 가버린 이방인 씨는 반성하는 마음으로 새벽부터 일어나 준비를 하고 부지런히 차를 몰아 약 7시 40분 경에 배심원 전용 주차장에 들어섰습니다.
법원의 security checkpoint를 지나 배심원 소집실에 입장한 시각이 7시 48분!
들어가자마자 어마무지하게 많이 와 있는 사람의 무리에 놀랐습니다.
미국의 형사재판에는 12명의 배심원이, 민사재판에는 12명 이하의 배심원이 배석되는데 그 날 소집실에는 어림잡아 70명 정도의 시민들이 있더라구요.
배심원 체크인/체크아웃 및 그 날의 일정을 진행하는 직원들이 있는 창구에는 이미 줄이 있길래 저도 조용히 맨 뒤에 섰습니다.

 

소환장에 붙어 있던 배심원 배지에 찍힌 바코드를 직원이 스캔하면 체크인이 됩니다.
소환된 배심원이 법원에 머무르는 동안에는
반드시 이 종이 배지를 플라스틱 커버에 넣어 가슴에 달아야 합니다.
법원 곳곳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변호인/검사와 의뢰인들이
배심원의 존재를 모르고 판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대화를 나눌 수도 있으니까요.

 

배지에 선명하게 명시된 저의 소환날짜는 12월 30일이라 저는 혹시나 직원이 "어제 왜 안 왔었나요?" 혹은 "늦게 오시면 어떡합니까?!" 등등의 말을 할까 봐 내심 긴장했는데 아.무. 말. 없.이. 지나갔습니다.
제 뒤로도 꽤 많은 사람들이 체크인을 하고 소집실에 비치된 설문지를 작성하여 들고 있으라는 지시를 들었습니다.
받아든 설문지에는 VOIR DIRE 라는 말이 쓰여 있었는데 '증인 또는 배심원의 예비 심문'이라는 뜻입니다.
혹시 법에 저촉될 수도 있으니 심문지를 공개할 수는 없지만 개인과 주변인 신상, 과거 배심원 경력을 묻고, 과거에 배심원의 의무를 이행한 적이 있다면 어떤 사건이었는지, 어떤 평결이 나왔는지 등등을 조사하더군요.
원본 밑의 복사지까지 두 장 포함되어 전부 3장이 완성되는데 이것을 들고 있다가 나중에 법정에 들어가면 그 때 제출하라기에 가만히 가지고 있었습니다.
8시 15분이 되어서야 모두가 체크인을 마치자 직원이 마이크를 들고 안내방송을 하더군요.

"Welcome to Jury Duty~"

라고 시작하여 배심원 소환일의 일정을 설명하는데 다른 건 다 흘려 들었지만 단 한 가지는 듣자마자 강렬히 머리에 꽂혔습니다.

"Jury Duty는 FULL DAY (하루 근로시간을 다 채우는) 의무입니다. 우리 모두 협력하여 꼭 오후 5시까지는 일을 끝낼 수 있도록 합시다!"


헐

하아~~??!!
아침 8시에 출석했는데 열심히 협력해야 겨우 오후 5시 땡을 할 수 있다고?!


12월 31일... 한 해의 마지막 날, New Year's Eve에 꼼짝없이 오후 5시까지 법원에 갇혀 있어야 한다는 말을 들은 모두의 얼굴은 차.게. 식.었.을. 뿐.입.니.다.
누구라도 감지할 수 있는, 우리에게 새해는 없다는 듯한, 음~울한 분위기가 넓은 배심원 소집실을 가득 채우고 저희는 오리엔테이션 비디오를 강제 시청했습니다.
캘리포니아 주정부에서 제작한 안내 비디오의 시작은 이렇습니다.
트랙터를 탄 농부가 푸른 잎이 만발한 어느 농장에서 즐겁게 수확을 하는 장면이 나오고, 다음으로 태양이 빛나는 바닷가에서 서핑을 즐기는 사람들의 화면이 나오더니 이런 음성이 들려옵니다.

"California, the greatest state of the union."
캘리포니아, 미국에서 가장 대단한 주


하하

풉~!
캘리포니아 주민들 모아 놓고 이게 무슨 손발 오그라들어 잼잼~ 하는 짓이여!


어쨌든 그렇게 애주심을 발동시킨 뒤, 배심원 제도는 민주적 정의구현을 위하여 시민이 가지는 특권이라며 기꺼이 응해줄 것을 당부하더군요.

처음으로 배심원 소집에 참석해 본 저는 이 날 솔직히 살짝 놀랐습니다.
소집실에는 백발이 성성하고 눈도 침침해 보이시는, 지팡이를 짚으신 할아버지도 와 계셨고, 이제 갓 18세가 되었을 법한 학생들도 보이고 더듬 더듬 말 하는 히스패닉계 사람들도 여럿 있었습니다.

 크으~ 민주적 정의구현! 다 같이 해 봅~시다!

그 후 비디오는 구체적인 설명으로 이어졌고, 저는 이 날 처음 배심원 소집과 선택에 대해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무작위로 뽑힌 누구나 배심원으로 소환될 수 있지만, 아무나 배심원으로 선택되지는 않습니다.
소환된 배심원들 중 Selection을 통해 선택된 12명 혹은 그 이하의 사람들 (각 재판당) 만이 법정에 배석되는 것입니다.

Selection을 위하여 배심원들은 일단 법정으로 호출되는데 이 때 VOIR DIRE 심문지를 들고 갑니다.
그리고 해당 재판이 어떤 내용인지 브리핑을 들은 후, 판사와 양측의 변호인들이 심문지를 토대로 소환된 배심원들을 한 명 한 명 인터뷰하지요.
이 때, 양 측의 변호인들이 자신들이 원하는 배심원을 고르게 됩니다.
의뢰인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편견이 없을 것 같은 사람들, 다시 말해 해당 사건을 해석함에 있어 편향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을 법한 조건을 가진 사람들이 선택되는 것입니다.
한 재판에 배석되는 배심원 인원수가 최대 12명이니 이 12인에 뽑히지 않은 나머지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다시 소집실로 내려와 다른 재판에서 필요할 때까지 대기해야 한답니다.

 

Standby (대기)라고 쓰여 있는 건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던 거죠.
거대한 법원 건물에 법정이야 부족하지 않을 테고 하루에 열리는 재판도 한두 건이 아닐 테니까요.


비디오를 다 보자 사람들의 얼굴에는 또 한 번 그늘이 짙게 드리워졌습니다.
그리고는 바로 첫번째 재판을 위한 selection에 불려갈 사람들의 이름이 호명되었죠.
약 30-35명 정도의 사람들의 이름이 차례로 불리고 그들은 모두 예비 심문지를 들고 지정된 법정으로 올라갔습니다.

과연... 이방인 씨의 이름은 호명되었을까요?!

아니죠~!!

그 날 온 사람들 중 절반 정도가 첫 재판 selection을 위하여 불려갔는데 제 이름이 호명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운이 좋아서?

아니죠~!!

저 배지를 자세히 보시면 저의 그룹 번호는 510이고 대기날짜는 12월 30일이죠?
그런데 저는 그룹 510이 출석해야 하는 날짜를 놓쳐 그 다음 날인 12월 31일에 갔잖아요.
12월 31일에 소환된 그룹은 514515였기 때문에 그 번호를 가진 사람들부터 호명되었던 것입니다.


신나2
에헤라디야~ 자진방아를 돌려라~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요?

전화위복?
눈 먼 행운?
운수소관?


어쨌든 저는 첫번째 재판에 불려가지 않은 30명 남짓한 사람들과 여전히 소집실에 앉아 있는데 직원이 아까 그 오리엔테이션 비디오가 흘러나오던 TV로 이것을 틀어주더라구요.

 

데니스 퀘이드가 나오는 패밀리 코메디 영화요.
법정의 재판 스케쥴에 따라 하루 죙~일 기다려야 하는 사람들을 위한 배려겠죠.

 

그런데 참... 시시한 영화길래 저는 차라리 배심원 소집실을 구경하기로 했습니다.
곳곳에 지루함을 달래줄 수 있는 간단한 오락거리들이 있더군요.
벽 한 쪽에는 여러 종류의 잡지들이 잔뜩 꽂혀 있었고 소집실 중앙의 넒은 공간에는 원탁이 있고 그 옆 책장에는 책들은 물론이고 이런 것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조각 퍼즐이 무려 5통이나 있었어요!!
원탁에다 펼쳐 놓고 맞추라는 거죠...

 

원탁 뒤 쪽으로는 작은 공간이 또 하나 있길래 들어가 보니 쿠키와 초콜렛, 음료수, 커피 자판기가 나란히 있었고 작은 테이블 위에는 또 이것이 있었어요.

 

편의점이냐?!

안녕하세요, 정의구현을 위해 노력하는 법원입니다.

감사
무엇을 도와드릴 데워드릴까요?

법원에 카페테리아가 있지만 직접 음식을 싸 와서 대기하는 동안 데워 먹어도 된다고 하네요.
아, 그리고 점심시간은 11시 30분부터 1시 30분까지입니다.

 

제가 이곳 저곳 호기심 대탐험을 하는 동안 시계는 9시 40분을 가리키고 안내 직원은 마이크를 잡고 방송을 시작했습니다.

"법원 서기가 스케쥴을 업데이트 했습니다. 첫번째 재판은 이미 시작되었고 그 후 재판들은 개정 여부가 확실치 않습니다. 오늘 이르면 3시 40분에 마칠 수도 있겠습니다."

사람들의 얼굴에는 조금씩 생기가 돌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날은 몰라도 12월 31일이라면 5시와 3시 40분은 차이가 크죠!

그러는 동안 첫번째 재판 selection을 위해 갔다가 선택받지 않은 행운아(?!)들이 다시 돌아오고 저는 자리에 앉아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습니다.
첫번째 영화는 다 끝나서 이번엔 또 이것이...

 

아이 참~
법원 직원 정말... 돈 주고는 안 볼 영화만 잘도 골라내는구나!

 

살 길은 어쨌든 빨리 점심 시간이 되는 수 밖에 없다 여기고 기다리고 있는데 시간은 더디게 흘러 겨우 10시 50분이 되었습니다.
첫번째 재판에 선택된 10명 남짓한 사람들을 제외한 나머지 60여 명은 또 하릴없이 기다리는데 직원이 또 한 번 마이크를 들었습니다.

"서기가 스케쥴을 통보했습니다. 오늘 더 이상의 개정은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지금 집에 돌아갈 수 있으며 이것으로 여러분의 이번 Jury Duty가 완.료. 되었습니다. HAPPY NEW YEAR~!"

정적과 하품만이 흐르던 조용한 소집실은 순식간에 파티장이 되었습니다.
Yeah~~~!!!! 하며 모두가 두 손 들고 환호성을 질렀거든요!
8시부터 5시까지 꼬박 하루를 지켜야 완료증을 받을 수 있는데 이 날 갔던 사람들, 그 중에서도 선택받지 못한 우리들은 겨우 3시간만에 완료증을 받을 수 있었으니까요.
이게 바로 그 행운의 증표랍니다.

 

이 완료증을 받으면 그 후 18개월 동안은 배심원의 의무가 면제됩니다.

 

완료증을 받으려면 처음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줄을 서서 바코드를 찍고 체크아웃을 해야 되는데 순서대로 그룹 번호를 부르더라구요.

"그룹 514 먼저 체크아웃 하러 오세요~"
"이제 그룹 515 나오세요~"

하는데 저는 그룹 510이잖아요!!

'이걸 어째.. 나는 집에 못 가는 거야?' 하며 다른 사람들이 다 나가는 동안 기다리고 서 있다가 맨 마지막에 우물쭈물거리며 "저기... 저는 그룹 510인데요." 했더니 그 직원이... 그 직!!!


체크인 때와 마찬가지로 아무 말 없이 바코드를 찍어 주었어요.

쌩유


법원 건물을 나오며 확인한 시계는 11시 3분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민주적 정의구현으로 가는 문턱에 발 한 쪽도 못 올려봤지만 어쨌든 하루 늦게 출석하여 6시간이나 빠르게 시민의 의무를 이행했다는 생각에 콧노래가 절로 나오더군요. 

어제부터 뒷 이야기를 궁금해하신 여러분, 설마 제가 눈물 콧물 짜는 처벌을 받지 않은 것에 실망하진 않으셨겠죠?
결과적으로 저는 흥미로운 경험으로 마무리했지만 제 사례를 일반화하시면 안 될 듯 합니다.
이 일이 있은 뒤 다른 도시에 사는 친척 동생에게 이야기 해 주었는데, 동생은 2년 전 소환일에 참석이 불가능하여 법원에 전화를 걸어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했더니 법원 직원이 고함을 치면서 험한 소리를 하더래요.
게다가 인터넷에 이런 경험담도 있었습니다.

 

내가 캘리포니아에서 jury duty에 한 번 불응한 적이 있었는데
한 2년쯤 뒤에 "(이번에) 응하지 않으면 벌금형/금고형에 처할 것"이라는 통지가 왔어.
그래서 갔지.


2년 뒤에 통지가 오다니...

느낌표

캘리포니아,
집요하다고 해야할지, 반응이 느리다고 해야할지...

 

저도 늦게라도 참석하지 않았다면 2년 뒤에 "법원에서 온 경고 통지"라며 사진과 함께 포스팅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네요.
이 날의 이야기가 이토록 길었기 때문에 어제 끝까지 들려드릴 수가 없었던 거랍니다.
드라마틱한 사건을 기대하신 분들께는 미안하지만 제게는 나름 재미있는 경험이었네요.

여러분도 운 좋은 하루 보내세요! 유후~


이것은 어디까지나 저의 개인적 경험담임을 다시 말씀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