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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lcome to California

미국인이 별 것 아닌 내 병명을 듣고 호들갑 떤 이유

by 이방인 씨 2020. 1. 18.

근 몇 달 사이에는 저는 급격한 노화를 겪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자도 자도 피곤하고,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힘들고, 무엇보다 조금만 몸을 움직여도 숨이 너무 차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거든요. 운동은 고사하고 급해서 빨리 종종걸음으로 뛰기만 해도 멈춰서서 가쁜 숨을 몰아쉬어야 할 정도로 호흡이 불편한 거예요. 아무리 일생이 운동부족인 이방인 씨이지만 전에는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기 때문에 속으로 걱정이 되더라구요.

하다 하다 이젠 폐에도 살이 찐 건가? 왜 이리 숨이 차지?
아니면 몇 개월 사이에 급작스럽게 늙기라도 한 건가?

이상하다 이상하다 하며 다이어트에 돌입해야 할까 고민하던 차, 우연히 다른 이유로 병원에 가서 피검사를 받을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날, 제 담당의에게서 검사결과와 함께 메세지가 왔더라구요. 

적혈구 수치가 너무 낮아 수혈을 고려해야 하니 1주일내 재방문하여 상담바랍니다.

이거였구나! 이거였어, 빈.혈.
지방폐도 아니고 노화도 아니고 
피가 모자라~

(처음에 피자 모자라~ 라고 오타내고 배고파졌어요.)

저는 정말 까맣게 몰랐답니다. 육체적으로 튼실해 보이는 제게 빈혈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기에 깜짝 놀랐죠. 일단 노화로 인한 증상이 아니란 것을 알고 나서는, 마음의 여유가 생겨서 1주일 내 재방문하라는 의사의 권고를 심각하게 듣지 않고 그냥 나중에 시간나면 가야지 하고 잊어버렸죠. 그러다 어느 날, 눈앞이 핑~ 돌다가 깜깜해지는 경험을 하고 나서 '가긴 가야겠다' 하고 예약을 하고 보스에게 어느 어느 날, 월차 쓰겠다고 말했죠. 그런데! 피가 모자라다는 말을 듣고 보스가 그렇게 기절할 듯 놀랄줄 누가 알았나요. 보스는 마치 빈혈 (Anemia)이 죽을 병이라도 되는 냥 펄쩍 뛰며 놀라더라구요.

지금 바로 가야 되는 거 아냐? 당장 가.
당장 의사한테 가서 바로 어떻게 좀 해달라고 해.
지금 가라고!

응? 뭐지 이 불필요한 긴박함은?

눈을 둥그렇게 뜨고 속사포같이 말하는 보스를 보고 오히려 제가 어안이 벙벙해졌습니다. 평소 제 보스는 직원들이 회사 안나오는 걸 제일 싫어하거든요. 휴가가는 것도 싫어하고, 심지어 교육받으러 가서 결근하는 것도 싫어해서 직원들이 보통 곤란한 게 아니지요. 그런 사람이 빈혈가지고 당장 병원에 가라고 하는 게 의아해서 저는 예약시간에 맞춰서 가야지 지금 가봤자 소용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회사에 출근했는데, 친한 팀원들이 하나 둘, 제 자리에 들러서는,

방인 씨, 정말 괜찮은 거야?
수혈받아야 한다며?
병원에 빨리 가야지.


저를 쳐다보며 다들 병원에 최대한 빨리 가라는 거예요. 이쯤되니 저는 직감했습니다. 

아...!
  이민자의 순간 왔구나.
또! 왔구나.


"이민자의 순간"이란, 제가 쓰는 말로, 미국인들이 제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언행을 보일 때를 일컫는답니다. 고작 빈혈가지고 이들이 왜 이리 호들갑을 떠는지 저는 도통 알 수가 없었어요. 하도 조심스레 말을 하길래 저는 순간,


뭐지? Anemia가 내가 알고 있는 빈혈이 아닌 건가?

혹시 내가 Anemia (빈혈)을 Leukemia (백혈병)이라고 말한 건가?
아니 아니 확실히 빈혈이라고 말했어. 수혈 얘기까지 했는 걸.
근데 이 사람들 왜 이러는 거지?


상황파악이 안된 저는 걱정해줘서 고맙다고 대꾸하면서 눈알만 데굴데굴 굴렸습니다. 그러다 휴식시간에 제가 가장 믿고 있는 미국인 친구에게 전화를 했죠. 제가 "이민자의 순간"을 경험할 때마다 상담을 하면, 친구는 솔직하게 대답해주곤 했거든요. 이 날도 대뜸 전화해서,
 

내가 빈혈이 있어 수혈을 받는 게 좋겠다고 해서 직장에 알렸더니, 다들 내가 죽는 줄 알지 뭐야?
이게 대체 무슨 일이니?


물었더니, 아니 세상에 이 친구도 난리가 난 거예요. 어쩌다가 빈혈이 왔냐며, 수혈은 언제 받는 거냐며, 받으면 나아지는 거냐며! 머리가 어지러워진 저는 "너까지 호들갑 떨지 말고 설명을 해 보아라. 빈혈이 뭐 대수라고 이 난리냐" 했더니 친구 왈,

그러니까.. 그건.. 약간...
제 3세계 병 같달까??

아니 어쩌다 네가...

아하~! 이민자의 순간이 지나가고 유레카의 순간이 찾아옵니다.

근현대사를 통틀어 전 세계에서 가장 "풍요롭게" 살아온 미국인들은 음식이든 영양소든 "과잉"만 알지 "결핍"에는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자연적으로 얻지 못하는 영양소라면, 동네 마트에만 가도 쉽게 구할 수 있는 수백가지의 영양제와 보조제로 섭취를 하고야 마는 사람들이거든요. 이런 사람들에게 빈혈이란 건 영양실조나 마찬가지인 것이랍니다. 그리고 "영양실조 같은 건" 먹을 게 없는 제 3세계 사람들에게나 벌어지는 일이지요. 미국인이라면 아무리 궁핍하더라도 하다 못해 정부에서 발행하는 Food Stamp로 식품은 살 수 있으니까요.

친구 이야기를 들으니 왜 직장동료들이 왜 호들갑이었는지 알 것 같습니다. 의아했을테죠. 미국에서 20년 가까이 살았는데 어쩌다 빈혈이 생겼는지 말이죠. 하하. 최근에 몸이 아팠거나 사고로 출혈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멀~쩡히 직장 다니다가 어느 날 갑자기 피가 부족하다고 하니까 도대체 집에서 섭생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궁금했을런지도 모르겠습니다.



미국인들은 주로 영양과잉으로 인한 병에 익숙하답니다. 성인병은 줄줄이 꿰고 있지만 의외로 빈혈은 자주 접하지 못했나봐요. 워~낙 잘 들 드시니, 일단 영양상태가 좋거든요. 빈혈이나 영양실조의 원인은 다양하지만, 관심없는 사람들은 단순히 영양소 결핍으로 인해 생긴다고 오해하기 쉬운 모양입니다. 사실 저도 미국에서 20년 가까이 살았지만, 주변 미국인들에게서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뭐, 고혈압, 동맥경화, 심근경색, 위절제술 따위는 숱하게 들었지만요.  

이런 연유로 동료들에 한마디씩 들었던 이방인 씨는 빈혈을 잘 치료하여 현재는 숨이 차지 않아도 운동은 하지 않는 원래의 생활로 돌아왔답니다. 괜찮아지고 난 뒤에, 부모님께 말씀드렸더니 어머니의 반응은,

빈혈? 그 까짓게 뭐 병이야?
괜찮아. 엄마도 네 나이 때 빈혈로 픽픽 쓰러지고 그랬어.

역시!
이게 바로 내가 아는 빈혈에 대처하는 자세이다!

이쪽은 또 이쪽대로, 지나치게 무심하여 따.스.한. 어머니의 품에서 위안받은 이방인 씨였답니다.


여러분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유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