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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이야기

미국 의사가 엄마와 나를 차별해도 기분 좋았던 이유

by 이방인 씨 2012. 4. 28.

제가 미국에 온 지 몇 년 안되어서 안과에 한 번 간 적이 있었습니다.
40대쯤으로 보이는 백인 남자 의사선생님이 계신 곳이었는데, 제가 이 병원에 처음 온다고 했더니 "그럼 대체 그 동안 어디 있었던 거예요?" 하고 장난스레 물으시길래, 웃으면서 한국에서 왔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갑자기 눈을 반짝 뜨시면서, 대뜸 남한 사람들은 북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으시더라구요.
상당수의 미국인들이 Korea 에서 왔다고 하면 South 냐 North 냐는 우리입장에서는 어처구니 없는 질문을 하기도 하는데, 이 의사 선생님은 북한에 대해 나름대로 아시는 분이었나봅니다.

음...남한과 북한은 서로 적이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원래부터 한민족이었고, 또 언젠가는 다시 통일되리라고 믿고 있거든요.

그 당시에는 천안함이나 연평도 포격같은 사건이 일어나기 전이라 북한에 대한 경계심보다는 나라의 분단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더 컸기 때문에 저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선생님, 갑자기 정색을 하십니다.

김정일같은 미친 인간이 통치하는 나라와 어떻게 우방이 된단 말입니까?
북한은 정말 위험한 나라예요.

조지 부시 정권 당시, 미국은 북한을 이란과 함께 악의 축 (axis of evil)로 규정하고 엄청나게 언론에서 떠들어댔기 때문에 미국인들은 북한과 특히 김정일에 대한 반감을 심하게 가지고 있었거든요.
그 당시 분위기가 그랬기 때문에, 저는 선생님의 반응에 놀라진 않았지만 그래도 기분이 썩 좋지 않더라구요.
그래서 저도 물러서지 않고 대꾸했죠.

미국인들은 그렇게 생각할 지 몰라도, 우리에겐 그렇게 단순히 규정할 수만은 없는 문제예요.

분위기는 급격히 냉각되고 필요한 진료만 묵묵히 마치고 진료실을 나오면서 보니, 복도에 커다란 세계지도가 걸려있고 나라마다 빼곡히 색색의 깃발 압정이 꽂혀 있었습니다.
지도 밑의 설명을 보니, 이 병원에 다녀간 모든 사람들의 출신 국가에 직접 깃발을 꽂은거라고 하더군요.
워낙 세계 각국에서 이민자가 모여드는 곳이다 보니, 병원측에서 환자들과 재미있는 교류를 위해 마련한 지도였던거죠.
제가 그 설명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는데, 진료차트를 접수대에 가져다주러 나온 선생님이 저를 보시더니 저한테는 깃발 꽂으란 말도 한마디 안하시고 Good-bye 하시고 쌩~ 들어가버리시더라구요.
저도 "흥! 나도 아쉬울 거 없습니다요." 하고 그냥 집으로 와 버렸죠.

그 후로 눈이 오래도록 멀쩡했는지라 안과에는 갈 일이 없어서 10년 정도를 잊고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2주전쯤에 저희 어머니가 백내장 검사를 하시고 싶어하셔서 안과 갈 일이 생겼죠.
그 때 그 병원에 집에서 제일 가까운 안과였기 때문에, 어머니가 그 병원에 다녀오셨는데요.
어찌된 영문인지, 집에 돌아오신 어머니께서 "그 의사 참 친절하더라~" 하시는게 아닙니까?
그래서 전 "엄마, 혹시 어느 나라 출신인지 안 물었어요?" 하니 엄마가 대답하시길

물어보더라. 그래서 내가 한국에서 왔다고 했더니 엄청 좋아하던데?

잉? 엥? 뭐라?? 좋아했다굽쇼?? 그것도 엄청??
그럴리가 없다고 생각되서 엄마가 받아온 명함을 다시 들여다보니, 분명히 그 때 그 의사가 맞는겁니다.
엄마에게 자초지종을 꼬치꼬치 물었더니,

그 선생님 삼성 핸드폰이랑 LG냉장고 쓰고 이번에 대학 들어간 자기 딸은 현대차 사줬는데 한국물건들이 진짜 믿어지지 않을만큼 품질이 좋아졌다고 막 흥분해서 말하더라.
90년대까지 한국물건은 중국제품이랑 별반 다를게 없다고 생각해서 일제만 썼었는데 이젠 한국물건 품질이 제일 좋다고 진짜 놀랍다고 하던걸.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저희 엄마는 복도에 걸린 세계지도에 깃발을 꽂고 오셨다는 겁니다!!!
진료를 마치고 의사가 접수대에서 악수를 청하더니, 엄마에게 깃발 압정을 주고 지도에 꽂으라고 했대요!!
아니, 이 분이...정말...사람을 차별해도 정도가 있지!
참고로 저희 엄마는 서울이 아니라 저희 고향인 강원도에 깃발 꽂고 오셨대요. 사모님, Nice Shot~! ㅋㅋ

10년만에 이렇게 대우가 달라진 걸 보니, 새삼스레 한국의 발전상이 대단하게 느껴집니다.
비단 저 의사 선생님뿐만이 아니라, 대다수의 미국인들이 예전에는 한국하면 전쟁을 겪고 분단된 나라라는 이미지를 먼저 떠올렸지만, 지금은 세계 전자기업계를 선도하는 뛰어난 기술력과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야기하곤 합니다.
저야 지난 10여년을 외국에 살아온 그저 교포일 뿐이지만 각 분야에서 열심히 노력해 오신 본국의 모든 분들께 감사한 마음이 드는 하루였답니다. ^-^
여러분 모두 힘내시고, 즐거운 주말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