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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lcome to California

"나 때는 말이야" 시전하는 미국 부모들, 내가 다 답답하네

by 이방인 씨 2019. 12. 25.

제 주변에는 저보다 연배가 높은 미국인 친구들이 많습니다. 나이에 상관없이 "friend"가 될 수 있는 나라이다 보니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기 때문이죠. 사실 제 또래중에는 현재 어린 아이들을 키우고 있는 친구가 대다수라 자연스레 멀어진 것도 이유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만나서 육아에 관해 대화하고 정보를 공유할 친구가 필요한데 그런 분야는 영~ 제 관심사가 아니라 만나면 서로 답답하거든요. 


하여 어쩌다 보니 저보다 한 세대쯤 앞선 분들과 어울리게 되었는데 한달에 한 번씩 점심 모임을 갖습니다. 어제가 바로 그 모임 날이었는데 모두 네 명이 점심을 함께 먹었습니다. 저를 제외한 세 명에게는 모두 중고등학생 자녀들이 있기 때문인지 어쩌다 보니 대학진학이 화두가 되었습니다.


그 중 한 명의 아이가 현재 고등학생인데 의사가 되고 싶다며 진지하게 의대진학계획을 세우겠다고 했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저와 나머지 두 명이 보인 반응이 어찌나 달랐는지 흥미롭더라구요. 저는 듣자마자 이렇게 반응했습니다.


"오, 아이가 공부 잘하나 봐요. 좋겠네요!"


그런데 나머지 두 명의 친구들 (역시나 10대 청소년 아이들을 키우고 있는)의 반응은 저를 놀라게 했습니다.


"뭐? 그 학비를 다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냥 학비 걱정 없이 다닐 수 있는 학교가 제일이야!"


미국에는 한국처럼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진학할 수 있는 예과를 포함한 의대가 없습니다. 일반 4년제 대학을 졸업한 뒤, 다시 Medical School이라고 하는 4년제 학교에 입학하여 무사히 졸업해야 의사가 될 수 있죠. (자세한 내용은 제가 오래전에 쓴 글을 참조해 주세요. 2012/06/30 - [U.S. Colleges] - 미국 유학정보 - 미국에서 의사되기...휴~ 힘듭니다.)


게다가 과에 따라 residency와 fellowship을 거쳐야 비로소 전문의가 됩니다. 소요되는 시간과 비용이 어마어마한 거죠. U.S. News의 기사에 따르면 2019-20 평균 대학 학비는 다음과 같습니다.


자신이 사는 주의 공립대학: 연간 $10,116 (한화 1,170만원)
다른 주의 공립대학: 연간 $ 22,577 (한화 2,626만원)
사립대학: 연간 $36,801 (한화 4,280만원)


가장 학비가 적게 드는 자신이 살고 있는 주의 공립대학을 선택한다고 해도 졸업하려면 거의 5천만원이 드는 셈이죠. 거기에 가히 천문학적이라고 할 수 있는 Medical School 4년을 더해야 하죠. 미국 의대 평균 졸업 비용은 가장 저렴한 자신의 사는 주의 공립인 경우 $147,020 (한화 1억 7천만원)이며, 학비가 많이 드는 사립일 경우 $236,304 (한화 2억 7천만원)이라고 합니다.


여유가 있어서 자녀 교육에 부족함 없이 투자할 수 있는 집이라면 모를까, 보통 30년 모기지를 갚으며 살아가는 평범한 미국 서민들에게 아무리 의사가 된다지만 자녀 학비로만 3억 이상을 쓴다는 건 상상만 해도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학비를 제외하고도 아이에게 들어가는 비용이 만만치 않은데다가 1명 이상의 자녀가 있다면 더 힘들겠죠. 그리하여 부모님에게 학비지원을 기대하기 힘든 학생들은 학자금 대출을 받게 되고, 상당수 학생들이 의대 졸업후 빚더미에 앉는다고 합니다. 물론 의사들의 연봉이 타직업에 비해 높은 것은 사실이나 의사가 된 후에도 학자금을 갚을 때까지는 고생하게 되겠죠.


현실이 이렇다 보니 미국 서민층 부모들은 아이가 의사가 되고 싶다고 해도 반기지만은 않습니다. 돈에 관해서라면 무서우리만치 현실주의자가 많은 나라가 미국이라 "너한테도 나한테도 부담인 의대를 꼭 가야되겠니?"라며 회의적인 부모들도 꽤 있지요.


어제 모인 친구들 중 의대에 가고 싶어하는 아들은 둔 친구는 "9년 안에 은퇴하려고 했는데 물 건너 갔다니까. 이대로라면 아들 졸업하기 전까지는 쉴 새 없이 일해야 할 판이야." 하며 살짝 한숨을 쉬었습니다.


저는 그래도 "속도 안 썩이고 공부도 잘하니 얼마나 좋냐"며 위로했지만 나머지 두 명은 가차 없습니다.


의대 간다는 건 자기 선택이니까 좋은데, 나 같으면 학비 지원 안 해줄거야. 의사는 네 아들이 되는 건데, 왜 네가 은퇴를 못해야하는데? 난 내 아들한테도 말했어. 집에서 가까운 공립대학으로 진학하라고. 그러면 집에서 살면서 밥먹고 다닐 수 있으니까. 그리고 학비는 일정부분 지원해주겠지만 그 이상은 바라지 말라고. 만약 다른 주로 가거나 사립으로 가면 진심어린 응원만 해주겠다고. 이것도 후한 거지. 난 고등학교 졸업 후 우리 부모님한테 1원도 안 받았어.


그 친구는 농담이 아니라 진심이었습니다. 


난 단 한번도 사람을 대학 간판으로 판단해 본 적이 없어. 내가 직원을 뽑을 때도 마찬가지야. 대학 이름을 보고 뽑은 적은 맹세코 한 번도 없을 뿐더러 심지어 학사학위가 없어도 차별하지 않았다고. 세상에는 나 같은 사람도 많아. 난 이력서에 화려한 한 줄을 쓰기 위해 학비 감당도 안되는 명문대학에 다닐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내 아들한테도 똑같이 말했어. 어느 학교에 가는지는 네 선택이지만, 스스로 학비를 감당할 수 없는 학교를 선택한다면 그것 역시 너의 선택이니까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고.


법적 성인인 18세를 지나면 부모의 인생과 자녀의 인생을 분리하는 진정한 미국인의 마인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요즘은 미국도 젊은 부모들은 타협할 수 있는 한에서 최대한 아이들에게 금전적 지원을 해주는 추세인데, 이 분은 자신의 철학이 확고한 편이었습니다. 


그런데 듣고 있던 나머지 한 명도 거들더라구요.


그건 나도 그렇게 생각해. 내 큰 아들은 올해 고등학교 졸업하는데 대학은 가지 않겠다고 해. 나는 그래도 대학 진학을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지만, 싫다는데 굳이 강요할 생각은 없어. 자기 인생 자기가 사는 거지. 사업을 하고 싶다고 해서, 일단 컨설턴트 사업하고 있는 내 친구한테 인턴자리 하나 부탁해 놓긴 했는데,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건 거기까지야.


이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고 저는 무슨 생각을 했냐면요...


"취지는 좋은데 요즘 시대를 너~무 모르신다."



나 때는 말이야~
명왕성은 아직 행성이었다고!



이 분들이 아직도 세상이 자기들 어릴 때 같은 줄 아시나 봅니다. 대학 졸업장 없어도 되고, 학비는 스스로 벌며 학교 다닐 수도 있었던 호시절이 있었습니다. 네네. 8-90년대 미국은 경기가 워낙 좋았던지라 게으르지만 않으면 대학 졸업장 없이도 잘 먹고 잘 살 수 있었지요. 위에 등장한 친구들이 바로 시대를 잘 만나 대학 졸업장 없이도 취직 잘하고, 대학에 간다해도 학비도 지금보다 훨씬 저렴했고, 심지어 연방정부 및 주정부에서 학비지원도 빵빵하게 받았죠. 그러니 자신들은 부모들이 지원해주지 않아도 스스로 헤쳐나갈 수 있었던 거랍니다. 


그러나 지금은 미국도 바뀌었어요. 일단 대학졸업장이 없으면 좋은 직장에 취직하기 힘듭니다. 경쟁시대에 접어들면서 좋은 대학을 좋은 성적으로 졸업해야 취업시장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게 되는 건데, 그러려면 공부에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하죠. 학비걱정으로 아르바이트 뛰면서 어떻게 공부에 매진하겠습니까. 게다가 그렇게 아르바이트를 한들 천정부지로 치솟은 학비에는 택도 없어 학자금 대출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졸업 후 학자금 대출을 갚으려면 벌이가 좋아야 되는데, 그 벌이가 좋은 직장에 들어가려면 이력서의 화려한 한 줄이 필요하다는 돌고 도는 이치.


현실이 이러할진데, "우리 부모님은 땡전 한 푼 안 주셨지만 나는 잘 살아왔다고."라는  나 때는 말이야 를 시전하는 미국인 친구들을 보니 미국 기성세대들도 요즘 청년들의 현실에 너무 무관심한 건 아닐까 싶었습니다. 제가 다 답답해지려고 하네요...


여러분 즐거운 하루 유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