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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단신(短信)

공개 고민상담!

by 이방인 씨 2020. 8. 21.

여러분, 어떻게 지내고 계십니까. 건강과 안전이 최고인 요즘, 모두 무탈하시길 빕니다. 저도 건강히 잘 지내고 있답니다.

육신은 말이죠...

오늘은 사실 제가 지난 몇 달간 끙끙 앓아오던 고민 한 가지를 여러분께 털어놓고 조언을 구할까 합니다. 저도 이젠 청년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적지 않은 세월을 살았다고 할 수 있는데 이런 상황에 직면한 적은 처음이라 도무지 해결방안이 생각나지 않네요. 몇 달을 마음고생하다 보니 최근에는 불면증과 무기력이 찾아와서 어떻게든 타개책을 찾고 싶네요. 여러분이 잘 들어보시고 고견을 주십시오. 공개댓글도 비밀댓글도 모두 환영하니 주저말고 조언해주세요.

제발~~~~~~

그러니까 이게 어찌된 일이냐면 말이죠...

저는 약 15개월 전에 현재 다니고 있는 직장으로 이직을 했습니다. 저를 직접 인터뷰하고 채용한 상사는 회사내 2인자인데, 여왕벌 기질 다분한 미국 여성입니다. 성격은, 일을 떠나면 아주 다정다감하고 동물 사랑하고 봉사정신 투철한 상냥한 50대 아주머니인데 직장내에서는 공격적이고 독선적라는 악평이 자자할 정도로 다른 모습을 갖고 있답니다. 하극상은 절대 용납하지 않고, 반항은 철저하게 공개적으로 응징하는 타입이라 직원들이 다 "공포정치"라고 할 정도 강력한 권력을 휘두르는 분이랍니다. 심지어 사무실내 1인자인 본부장님조차 그녀에게는 늘 조심하는 편이죠. 성격이 보통 쎈 분이 아니시거든요.

입사 지원하고 인터뷰할 때는 너무나 소녀같고 상냥하셔서 이런 면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가 입사하고 나서 이 분 바로 직속으로 배치받고 2주만에 '아... 나 망한 것 같다. 이 분 웬만한 상대가 아니야..' 생각했지만 포기하지 말고 적어도 1년은 버티자는 심정으로 열심히 일했습니다. 같은 직속 부하 라인에 있는 두 명의 입사 선배들이 친절하게 이런 저런 조언도 해주고 어떤 상처받는 일이 생겨도 저 분은 원래 아무에게나 저런 분이니까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기라고 위로해주더라구요. 그래서 그 선배들과 서로 감싸면서 이직 초기를 무사히 버텼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기 시작했어요. 어찌된 일인지 그 공포정치의 주인공인 여왕벌 보스가 저를 예뻐해주기 시작한 겁니다. 어찌된 일인지라고 쓰긴 했지만 사실 이유는 알고 있어요. 저는 어릴 때부터 다소 보수적인 아버지 밑에서 "예절, 예의, 연장자 공경 등등" 정말 유교적 잔소리면 잔소리, 훈계면 훈계, 암튼 있는대로 다 들으며 자라서 기본적으로 나보다 연장자인 상사에 대한 예절이 육신과 영혼에 스며들대로 스며든 인간이거든요. 거기다 어릴 때 할머니 할아버지 손에 크기도 했구요. 어쨌든 그러한 배경 덕분에 제가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아도 그냥 자연스레 연장자 + 상사에 대한 배려가 튀어나와요. 그런데 생각해보면 딱히 큰 배려도 아니랍니다. 예를 들면 이런 거예요. 회의 중에 상사가 복사할 일이 있다고 하면 "제가 해드려요?" 라고 빈말이라도(?) 한번 물어는 보거나, 상사가 점심 먹으러 가자고 하면 그냥 군말없이 "네, 그래요." 하거나, 업무상 의견충돌이 있을 때 우선 상사말이 다 끝날 때까지 듣고난 후에 내 의견을 말하고 "저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뭐 어느 쪽도 괜찮아요. 어쨌든 우리 서울에만 가면 되는 거 아닌가요." 하고 웃거나.. 하는 식이예요. 아주 화가 나는 일이 있어도 당장 반응하기 보다는 나중에 기회를 봐서 "저번에 이러 저러한 일이 있었잖아요. 그 때는 생각할 시간이 더 필요해서 말하지 못했는데 아무래도 그건 아니었던 것 같아요." 라고 말하는 편이죠. (코로나 때문에 사무실 청소를 한 일이라던가 말이죠.) 여러분이 듣기에 이런 행동들은 부하직원이 상사에서 보여줄 수 있는 무난한 매너가 아닐까 싶은데요. 그런데요...


미국인들은 안 그래요.

미국인들이 성격이 나빠서, 예의를 몰라서가 아니라 그냥 이 나라에서는 그게 지켜야 할 예의가 아니라서 그래요. 상당수 미국인 직원들은 제가 저 위에 나열한 행동들을 하지 않아요. 사무실내에서 상사가 잡무를 보고 있으면 그냥 그러려니~ 하죠. 보스가 점심 먹으러 가자고 하면 누구는 "난 도시락 먹을래요." 또 누구는 "난 그 식당 안 좋아해요." 또 누군가는 "오늘은 선약이 있어요." 등등 아주 자유롭게 거절 의사를 밝혀요. 그게 잘못된 일도 아니구요. 상사도 별 생각 안 하죠. 또한 업무상 회의 중 상사와 의견충돌이 있을 때 어떤 미국인 직원들은 마치 인류의 평화가 이 논쟁의 결과에 달려있기라도한냥 진짜 목.숨.걸.고. 상사를 이기려고 들어요. 근데 들어보면 딱히 자신의 의견이 상사의 의견보다 어마무지하게 좋아서가 아니라 그냥 지기 싫어서 그래요. 암튼 이러한 일들이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미국 직장이랍니다.
상황이 이러한데, 보스가 저랑 있으면 자기 마음이 편하다는 걸 서서히 깨달은 것 같더라구요. 그냥 물 흐르듯 흐른다는 것을요. 처음에는 이유를 몰랐겠지만, 나중에는 저한테 이런 말을 하더라구요.


"너는 나랑 성격이 정말 잘 맞아! 혹 둘 중 하나가 이 회사를 떠나도 친구로 지내자!"

흐음... 성격이 잘 맞는다기보다는 제가 "직장상사가 주는 스트레스는 어느 정도는 기본값"이라고 인식하는 타입이라서 크게 반발할 일이 없었던 것이지요. 그 후 정말로 제가 자신과 잘 맞는 사람이라고 여기신 탓인지 실제로 저한테 엄청나게 친절하게 대하기 시작하셨어요. 원래 이 분한테 회의 중 면박 당하지 않은 직원이 거의 없을 정도고 칭찬도 가뭄에 콩 나듯 들을 수 있는데, 저한테는 확연히 다르시더라구요. 제가 회의 중에 무슨 말만해도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들으시고, 무슨 기회만 있으면 다들 듣는데서 칭찬을 하시더라구요. 처음에는 직장 스트레스가 다 사라질 만큼 좋기만 하더라구요. 회사갈 맛도 나구요. 지금도 일주일에 1-2번은 꼭 저랑 점심을 먹고 싶어하시고, 아침에 제 책상에 간식거리를 놓아두기도 하시고, 소소한 선물 같은 것도 해주세요. 감사한테 부담스럽기도 한 일이죠.

어쨌든 이리하여 공포정치의 스트레스에서 벗어나나 싶었는데, 상황은 한 번 더 반전을 맞이하였습니다. 그 전까지 저랑 잘 뭉치던 입사 선배 2명이 저를 적대시하기 시작했거든요. 아마 원인은 편애를 감추지 않는 상사 때문인 것 같습니다. 하기야 제가 민망할 정도니까요. 아휴...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제 마음이 정말 불편했는데 그 선배 2명은 많이 서운하고 속상하고 그랬겠죠. 그래서 은근히 저를 따돌리고 제가 보는 앞에서 둘이서 속닥거리고 해도 저는 내가 지은 죄는 아니지만 내가 그 입장이면 나도 속상하겠다 싶어 그냥 아무말 안 했습니다. 심지어는 회사에서 이벤트 모금을 했는데 둘이 저한테 와서 우리 셋이 똑같이 $00씩 내자 말해놓고, 나중에 둘이서만 더 큰 금액을, 그것도 상사 사무실에 직접 찾아가서 전달했더라구요. 저는 셋이서 합의한 금액을 그냥 모금함에 넣었어요. 그 둘이 따로 돈을 냈다는 건 상사분이 제게 말해줘서 알았구요. 이런 종류의 작지만 치사한 복수들을 여러번 당하고 나니 저도 불쾌하고 불편해서 어색하게 지냈습니다.

그러던 와중 일이 터졌네요. 이 선배 2명이 해야되는 프로젝트를 상사가 저한테 줘버린 거예요. 이 때 저도 '아.. 이건 아닌 것 같은데.' 하고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2명이 저한테 와서 한마디씩 쏘아붙이고 가더라구요. 마치 제가 프로젝트를 뺏은 것 처럼요. 맹세코 저는 일을 더 떠맡기 싫은데 말이죠. 아니, 프로젝트를 저한테 준 사람은 상사인데 그 앞에서는 한마디도 못하고 저한테 와서 따지니까 저도 열.받.지. 않겠어요? 그래서 선배들이 그렇게 불만인데 왜 말을 못하냐고...가서 따지라니까 또 그건 못하고 그 후로 한 3일을 내내 말로 비꼬고, 괴롭히는 거예요. 둘이 같이 말이죠. 그래서 제가 참다못해 상사한테 가서 물었습니다."이 프로젝트를 정말 제가 하는 게 온당한가요? 아무래도 선배 1,2가 하는 게 맞지 않나요?""왜 그런 질문을 해? 선배 1,2가 뭐라고 해?""아무래도 기분이 안 좋겠죠."여기까지 말하고 제가 기대한 것은, "그럼 내가 다시 조정하겠다" 내지는 "내가 따로 잘 이야기하겠다." 정도의 답변이었는데 와우~ 이 분은 정말이지...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 선배 1,2의 자리로 걸어가셔서 다다다다 뭐라고 하십니다.

"불만 있으면 나한테 직접 말해! 시키는 일 하는 사람한테 뭐라고 하지 말고!! 이 일은 방인 씨가 더 잘할 것 같아서 시킨 거야. 너희들에게는 다른 프로젝트 맡길게."


OH MY GOD....

신이시여 정녕 계시긴 한 겁니까. 이 분은 정말이지 그 어느 누구의 감정도 고려하지 않는 오로지 자기가 원하는 것만이 중요한 분이셨던 겁니다. 선배 1,2가 저를 죽일듯이 노려본 것은 물론이고, 저는 그 자리에서 차라리 돌이되기만을 빌었죠. 보스가 돌아가버린후 저는 제가 사과할 만한 일을 한 것인지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그냥 무조건적인 사과를 하고 있었어요. '내가 보스에게 이 일은 내가 하는 게 아닌 것 같다고 말했고, 내가 말릴 틈도 없이 성큼성큼 걸어와버렸다. 이렇게 될 줄 몰랐다'라고 말이죠. 그리고는 한 20여분간을 멍~하니 제 책상에 앉아 '이 직장 그만두는 게 나을까..'하며 고민하고 있는데 상사가 제 책상으로 전화를 해서 저를 부릅니다. 터덜터덜 상사 방으로 갔더니,"내가 곤란하게 했지? 걔들이 또 뭐라 그래? 미안."

아... 저는 웃음밖에 안 나옵니다.
1도 웃기지 않지만 웃음만 나옵니다. 


이 일이 있은 후, 사실 저는 이직을 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상사가 좋아해줘도 이런 건강하지 못한 성격의 상사 밑에서 일하다가는 제 명에 못 죽을 것 같아서요. 그런데 뭐... 이직이 뭐 그리 간단한가요. 이것 저것 고려할 것이 많으니 생각처럼 안되네요. 사실 지금 회사의 조건이 만족스러운 편이고, 집에서 5분 거리거든요. 이 마지막 조건이 정말 포기하기 어려운지라... 그래도 이직 서류를 몇 군데 넣어놓기는 했는데, 생각처럼 일이 원만히 빨리 진행되지 않죠. 더욱이 요즘 시국이 시국이라. 그래서  몇 개월 째 상사의 부담스러운 사랑과 선배들의 구박 사이에 끼어 고생중입니다. 매일 선배들 얼굴 보는 게 고역이예요. 근데 참 웃긴게, 제가 등만 돌리면 속닥속닥 흉보는 소리가 들리는데, 일부러 그러는 건지 얼굴 볼 때는 세상 둘도 없는 사이 좋은 동료인 척을 해요. 저한테. 지난 주에도 계속 '우리 점심 같이 먹자'고 제 자리에 와서 노래를 불러서 제가 "괜찮은 요일에 언제든지 말해요. 같이 가게." 했는데, 오늘 저 빼놓고 사이 좋게 점심 먹으러 갔다왔대요. 근데 일부러 그러는 것 같은 느낌적 느낌. 이러한 일이 굉장히 빈번하게 일어나요. 감정소모전 같아서 상대 안 하는 편인데, 이상하게 그러면 더 적극적으로 치댄단 말이죠. 친한 척 다가와서 제가 반응을 하면 다시 따돌리는 상황의 연속이예요. 차라리 대놓고 싫어하거나 그냥 일만 하는 사이로 지내면 편할 텐데 이건 뭐 어떻게 대응해야할 지 모르겠어요.

왜 이러는 걸까요?
저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제 주변 사람들은 다 무시하라고 하는데, 그게 그렇게 쉬운가요. 일로 엮인 사이라 계속 사무실에서 마주치는데. 뭔가 해결방안이 없을까요?

여러분의 조언을 기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