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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lcome to California

미국 선생님의 학생을 위한 배려, "빨간펜 선생님 보고 있나?"

by 이방인 씨 2012. 7. 19.

이틀전에 썼던 I ♥ NY 에 관한 글이 다음뷰 메인에, 그것도 굵은 글씨로 강조되는 첫 줄에 올랐더라구요.
음...사실 그 글은 제가 외출하기 전에 단 5분 정도를 할애해서 재미를 위한 글로 썼는지라 엉성한 부분이 많았지요.
그런데 평소에 길게 쓰던 포스트는 비인기글인데 그 날 쉽게 쓰여진 글이 메인에 올라서 인생의 참 진리를 다시금 느꼈습니다.

노력이고 뭐고, 그때 그때 운이 최고다

앗, 혹시 지금 미성년 학생들이 보고 있다면 저 말을 진담으로 받아들이면 안됩니다, 여러분. ^^;;

그러나 오늘의 본격적인 이야기는 학생들이 본다면 좋은 이야기네요.
바로 제가 미국에서 학교 다니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미국에서 고등학교와 대학을 다니면서 저는 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던 것이 있습니다.
선생님들의 시험지 혹은 과제물 채점 습관인데요.
한국에서는 틀린 부분이나 보완해야 할 부분을 짚어줄 때, 눈에 확 띄라고 빨간색 펜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죠?
유명한 학습지 빨간펜 선생님이 있을 정도로 빨간색 펜의 이용빈도가 높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제가 한국에서 학교 다닐 때도 학생들이 저마다 빨간 색연필이나 빨간펜을 가지고 다니면서 학생들끼리 시험지를 봐꿔 채점해야 될 때 사용하곤 했었습니다.
미국에 와서 보니 빨간색 펜으로 채점하는 선생님의 비율이 한국보다 현저히 낮더라구요.
제가 다닌 고등학교에서는 빨간색 보다는 검은색이나 파란색으로 채점하는 선생님이 대부분이었어요.
보라색이나 초록색을 쓰는 선생님들도 있었는데 희한하게 빨간색 채점지는 보기 드물었답니다.
빨간색 마크에 익숙해져 있던 저는 알아보기도 힘들고, 틀린 문제를 빨리 찾아내기도 힘들어서 속으로 생각했죠.

아니 이들은 왜 이렇게 요령이 없을까? 색깔만 바꿔도 훨씬 빠르게 볼 수 있는데... 

그런데 나중에야 선생님들이 일부러 빨간색을 피해서 채점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선생님과 한국에서 다니던 학교 이야기를 하다가 한국에서는 빨간색으로 채점해서 알아보기 편하다고 넌지시 말을 했더니 선생님의 말씀이,

물론 빨간색이 더 쉽게 눈에 띄지. 그런데 시험지를 받아들었을 때 빨간색으로 틀린 문제가 마크되어 있으면 학생들의 스트레스 레벨이 높아진다는 연구결과가 있기 때문에 우리 학교에서는 되도록 빨간색을 쓰지 않도록 하고 있어.

저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말씀에 잠시 멍~~해 있었습니다.
그리고나서 제가 한국에서 자신없는 과목의 시험지를 받아들 때마다 빨간 줄무늬를 보고 느꼈던 그 감정이 떠올랐죠.
물론 기대이하의 점수를 받으면 빨간색이든 초록색이든 실망하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선생님이 말씀하신 미국 대학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빨간색 마크를 보았을 때 스트레스 레벨이 훨씬 높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주 재밌는 결과는 반대로 시험을 잘 보았을 때, 빨간 마크는 성취감과 기쁨을 배가 시킨다고 합니다. ^^
요컨대 시험 성적이 좋은 학생이라면 빨간색 펜으로 채점하는 것이 더 좋다는 것이죠.
하지만 선생님이 채점을 시작하기 전에 미리 이 학생은 점수가 좋을거야, 나쁠거야 확신할 수도 없는데다가 설령 미리 예상이 가능하더라도 잘하는 학생은 빨강으로, 못하는 학생은 파랑으로 다르게 채점해 줄 수도 없는 일이니 점수가 낮은 학생들을 위한 배려로 빨간색 사용은 피하는 것입니다.

고등학교 선생님에게 이 말을 듣고, '성적수준을 떠나서 학생들을 위한 배려가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대학에 진학해서 보니 교수님들 중에도 검은색이나 파란색을 이용하는 분들이 많더라구요.
심지어 너무한(?) 교수님 중에는 연필로 채점하신 분까지 있었습니다. ^^;;
물론 이것은 형식이나 표준에 얽매이지 않는 미국인들의 성향 때문이기도 하겠지요.
그냥 책상에서 가장 먼저 잡히는 펜을 들고 채점하시는 분들이 많거든요. ㅋㅋㅋ
저의 물리학 교수님도 항상 검은색으로 채점하시는 분이었는데 어느 날 제가 궁금해서 여쭤보았습니다.

교수님, 그냥 검정펜이 손에 잡히셔서 검은색으로 채점하시나요? 아님 빨간색이 학생들의 스트레스를 증폭시킨다는 연구결과를 아셔서 그러시나요?

교수님이 대답하시길,

오, 그런 연구가 있었구나? 난 몰랐지만 충분히 예상 가능한 결과잖아.
난 빨간색으로 채점하면 마치 학생에게 너 이거 틀렸어! 라고 공격적으로 말하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빨간색은 쓰지 않아.

교수님의 말씀에 일리가 있죠?
사실 빨간색은 정열의 상징이기도 한 반면, 경계심을 불러 일으키는 호전적 컬러이기도 하죠.
그 때문에 간혹 빨간색으로 틀린 문제가 마크되어 있는 시험지를 보면 누군가에게 질책당했다는 느낌도 들곤 하구요.
그런데 사~알~짝 역으로 생각하면 빨간색 마크를 보고

뭐야, 이거? 전투의지가 막 불타오는데? 해보자는 거지? 다음번엔 기필코 백점 맞아주겠어!

라고 투지를 불태우는 학생도 있을지 모르겠네요.
혹시 이것이 한국 빨간펜 선생님의 고도의 전략일수도...?? ㅋㅋㅋ
저는 이런 선생님들을 만난 것을 계기로 후에 아르바이트로 어린 학생들 과외를 할 때 늘 파란색 볼펜을 사용하게 되더라구요.
응???? 그러고보니 내가 가르친 학생들이 시험 성적이 좋지 않았다는 얘긴가?!!
그리고 나는 그것을 이제서야 깨달았단 말인가?!!
음...지금와서 눈치채봤자....


(만화를 본 자만 웃을 수 있다는!)

글을 마치면서 당부드리고 싶은 것은, 이 이야기는 제가 만난 선생님들의 이야기로 미국 전체를 대변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또한 빨간색으로 채점하는 것을 비난 혹은 비판하기 위한 글이 아닙니다.
그저 미국에서 이런 경험도 했었다라는 이야기입니다.
오해 없으시길 부탁 드릴게요. ^^
좋은 하루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