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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직장생활

미국 직장 상사에게 밥 얻어먹기란 하늘의 별따기

by 이방인 씨 2019. 11. 9.

미국인들의 대쪽 같은 더치페이 문화에 관해서는 오래전에 한 번 글을 올린 적이 있습니다만 (2011/09/13 - [Welcome to California] - 미국인들의 쿨하다 못해 서늘한 더치페이 정신), 최근에 퍽 흥미로운 일을 겪은 터라 한 번 더 이에 관해 글을 쓰고 싶어 졌습니다.

어느덧 미국에서 산 세월이 한국에서 나고 자란 세월을 추월해 버린 이방인 씨, 이곳의 "각자 계산" 문화에 익숙해진 지도 오래인데요. 칼 같은 선 긋기에 무정함을 느끼던 이민 초기 시절도 있었지만, 이젠 저 또한 식사를 대접할 때는 조심스레 제안하고, 얻어먹을 때는 빚 진 기분을 느끼게 되었답니다. 익숙해지니 역시 "내 것은 내가, 네 것은 네가"가 편하더라고요.

이렇게 십 수년을 살다 보니, 함께 식사를 하는 상대가 나보다 나이가 많든, 경제적 혹은 사회적 지위가 높든 상대방이 식대를 지불할 수도 있으리라는 짐작을 전혀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물론 상대방이 식사 초대 시 미리 언질을 주기도 하고, 계산서를 집어 들며 "내가 살게"라는 제안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오히려 이쪽이 흔치 않은 경우죠.

직장에서 상사와 식사를 하게 될 때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무엇을 먹든, 값이 얼마가 나오든 각자 내는 것이 일반적이죠. 저는 현재까지 직장생활을 하면서 모두 일곱 분의 상사들을 만났는데 이 분들은 모두 저보다 연배와 연봉이 꽤 높았습니다. 그 일곱 분들 중, 부하직원들에게 단 한 번이라도 밥을 산 상사는 세 분뿐이었는데, 그중 2명은 아시안계였고, 나머지 1명은 부하직원의 첫! 출근 날 점심을 사주는 자신만의 룰을 지키고 있는 상사분이었습니다. 그 셋을 제외한 나머지 네 분에게는 딱히 무언가 얻어먹은 경험이 없지만 그 때문에 그분들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품은 적도 없습니다. 이 나라에서는 그것이 흔한 험담 거리도 되지 않기 때문이죠. 부하직원에게 밥을 사 주는 상사를 "Generous"하다고 평할 수는 있지만, 그 반대라고 해서 "밥 한 번 안 사는 짠돌이 상사"라고 폄하하지는 않는다는 말입니다.

연장자나 선배, 상사가 식대를 지불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은 한국 출신 이민자인 저도 로마에선 로마법을 따르라고, 밥 안 사는 상사에 대해 불만을 가진 적이 없었기 때문에 미국인 동료들은 그보다 더 대수롭지 않게 여기리라 생각했는데 며칠 전 저의 직장 절친인 T의 이야기는 저를 슬며시 웃음 짓게 했답니다.

T는 저와 2년째 같은 부서에서 일하고 있는 미국인 여성입니다. 며칠 전 T와 휴식시간에 사담을 나누던 중, T가 부서 내에서 사람 좋기로 유명한 상사 (한국식 직급에 대입하자면 부장님) B를 우연히 점심시간에 밖에서 만나 함께 식사한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화창한 어느 날, T와 팀 동료 2명은 점심 식사를 하려고 들른 샌드위치 전문점에서 B부장님을 만나게 되었답니다. 그리하여 부장님 외 3명은 이왕 만난 김에 함께 점심 식사를 하기로 했죠. 비교적 저렴한 샌드위치 식당이었기 때문에 T는 속으로 '어쩌면 부장님이 사실 수도 있겠는데...?' 하는 생각을 잠시 했다고 해요. 그러나, 부장님은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당신의 샌드위치만 구입하셨고, T와 동료들 역시 그 뒤를 따라 각자 샌드위치를 샀습니다. 그리고 나선 식후 커피를 마시러 가기로 했답니다. 샌드위치보다 더 가격대가 낮은 커피샾에 간 이들, T는 이번에야말로 부장님이 커피 한 잔 씩이야 사주실지도 모른다고 기대했다고 합니다. 4명 전원의 커피값이라고 해도 한화로 17,000원 정도였다고 하는데요. 우리의 직장 내 인기남 부장님은 이번에도 역시 깔끔한 동작으로 솜씨 조~오~케 당신 커피만 사셨다고 합니다.

T가 제게 속삭이길, "솔직히 말하면 B부장님이 그럴 줄은 몰랐어. 너도 알잖아. 그 B부장님이 말이야!"

살짝 흥분한듯한 T의 말에 저 역시 "그러게 말이야. 그거 좀 의외네." 라며 대꾸하긴 했지만, 제가 속으로 놀란 이유는 따로 있었답니다. 미국인인 T가 그런 일에 마음 쓸 줄은 몰랐기 때문이죠. 그동안 저는 미국인들은 더치페이가 당연한 문화에서 자랐기 때문에 상사-부하직원 사이에도 "사지 않습니다. 얻어먹지 않습니다." 실천하며 불만 따위 가지지 않는 줄 알았답니다. 그런데 더 깊이 들여다보니, 미국인들도 직장상사에게는 기대를 품기도 하네요. 입 밖에 내지만 않을 뿐 사람들 심리가 다 비슷하달까요. T는 이 사연을 누가 들을까 무서운 듯 소곤소곤 전해주고는 (일반적으로 미국인들은 액수에 상관없이 "금전적 인심"에 굉장히 조심스럽고 언급도 피하려는 편입니다. 이것은 자선 기부와는 다른 문제이지요.) 다시 자리로 돌아갔지만, 상사가 가끔 커피 한 잔 정도는 사 주길 바라는 그녀가 오히려 사람다워, 저는 빙긋이 웃었답니다.

이방인 씨가 언젠가 부장이 된다면, 커피는 자주 사겠어요! (부장이 된다면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