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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lcome to California

괴발개발, 저주받은 글씨의 미국인 친구의 변명

by 이방인 씨 2011. 9. 26.

 

가 미국 학교에 들어가서 최초로 받은 칭찬이 바로 이거랍니다.

 

Your handwriting is so pretty. 네 글씨 정말 예쁘다.


 참잘했어요

 


그리고 그 칭찬은 고등학교, 대학을 마치는 내내 계속 되었습니다.
제 고향 시골 마을에서는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글씨를 예쁘게 쓰는 것에 엄격하셨거든요. 그래서 단정한 필체를 가지게 되었지요. 그래도 한국에서는 여학생이라면 기본적으로 글씨를 예쁘게 쓰고 싶어하는 게
당연지사이니 별다른 생각없이 지냈는데 이게 왠일입니까. 글씨 잘 쓰는 것이 미국에서는 특별한 칭찬을 받을 수 있는 일이더군요. 왜 그런지는 일단 미국인들의 손글씨를 한번 보시면 아실 수 있습니다.

 

 

 

(google image)

 
놀라지들 마세요~ 영어 맞습니다. 


 안습 


이보다 더한 글씨도 학교에서 본 적이 있답니다.
맹.세.코.

 

 

 

이건 내용이 가관이네요.
자신의 손글씨를 폰트로 바꿔준다는 프로그램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아, 레알?
이런 글씨를 폰트로 쓰고 싶어?

시러


그게 무슨 기술 낭비람...?

 

 

 

아래 두 장은 양반이 썼는지 상태가 양호하군요.
미국에선 이 정도로만 써도 평균 레벨은 됩니다.

 

 

사실 같은 반 친구들이 어떻게 글씨를 쓰는가에는 크게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칠판에 수업을 하는 선생님의 글씨가 저 지경이라면 어떠시겠습니까? 저는 고등학교 때 한 번, 대학 때 세 번 정도 저 따위로 밖에 칠판 필기를 못하는 선생님들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대학 때는 어떤 교수님의 기말 교수평가 설문지에 도배되다시피 한 내용이 "도대체 뭐라고 쓰는지 못 알아보겠다"였던 적도 있었죠. 사정이 이렇다 보니 저에게는 호재였답니다. 선생님께서 시험지에 칭찬의 말을 별도로 써 주었던 적도 많고 보너스 점수를 준 적도 있었구요. 언젠가는 일본 출신 여선생님의 수업에 들어갔더니 수업 시작 전에 학생들에게 프린트물을 주욱 나눠주길래 받아 보니 제 과제물이더군요. 깜짝 놀라서 내가 뭘 잘못했나 생각하고 있는데 선생님 말씀하시길,

 

흥4


"너희들한테 이 정도까지 요구하지도 않을 테니,
제발 읽을 수나 있게 써 와라."

 


미국인 선생님이었다면 하시지 않았을 말씀이지만 아마 일본인이셔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몇 년째 칭찬받는 일이 계속되다 보면 별거 아닌 손글씨 하나에도 우쭐해지기 마련입니다. 어느 날은 옆에 앉은 미국 친구를 약간 놀린 적이 있습니다.

 
하하

 

너희들은 글로는 서로 못 읽어서 안 통하니 꼭 말로 해야 할 거야, 그렇지?

 


본인도 조금 웃긴지 킥킥대다가 한 마디 합니다.

 


"우리 미국인들은 실용주의자 (Utilitarians)라서 그래!"

 


그 친구 말인즉, 미국인들은 외형이나 미관보다는 기능이나 용도를 중요시 한다는 거죠. 
글씨의 목적은 예쁘게 보이는 게 아니라 써서 기록하는 것이죠아무리 괴발개발이어도 써서 기록한다는 본래의 목적을 달성했으니 그것으로 족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또 물었죠.

 

이방인 씨: 그래 그래, 써서 기록하는 건 좋은데 쓴 걸 못 읽으니까 문제 아냐?"


미국인 친구: 모르시는 말씀! 아무리 악필이라도 본인은 다 알아볼 수 있어.

 


헐


인상적일 정도로 이기적인 발상이구나!
읽는 사람 생각은 하나도 안 하는 게냐?!

 

 

이래서 이젠 대부분 교수님들이 타자 친 과제물이 아니면 안 받아주시는 거죠. 읽을 수가 없기 때문에!

그러나 이 친구의 말에는 대다수 평범한 미국인의 삶을 관통하는 철학이 담겨 있습니다. 실용주의가 바로 그것이죠. 한국인에게 유교사상이 자연스레 생활의 모든 부분에 영향을 미치듯 실용주의도 미국인의 모든 생활에 묻어납니다. 

 

미국 대학생들은 주로 백팩을 매고 다닙니다. 여학생들도 들고 다니기에 예쁜 가방을 든다든지, 책을 손에 들고 다닌다든지 하는 일이 드뭅니다. 또한 상당수가 운동화를 신고 다니죠.

 





위 사진의 학생들의 모습 어떻게 보이시나요? 차림이 너무 무성의한가요? 제가 다닌 미국 학교의 대부분의 학생들의 모습이 이러했답니다. (저는 샌프란시스코 소재의 고등학교와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을 졸업했습니다.) 여학생들은 거의 화장을 하지 않습니다. 상당수가 운동화를 신고 다니며 하이힐이나 예쁜 옷을 빼 입고 오는 친구도 많지는 않습니다. 물론 매일 머리부터 발끝까지 풀세팅하고 오는 친구들도 있긴 합니다. 사람은 다 제각각이고 어디에나 외모 가꾸기에 열중하는 여성들은 있기 마련이잖아요? ^^ 하지만 보편적 다수가 수수한 차림으로 다니는 편입니다. 옷은 몸을 보호하는 목적에 충실하면 되고 신발은 걷기 편한 게 최고이며 학교에 매고 오는 가방은 책과 수업도구를 넣으면 그만이고 학교는 배우러 오는 곳이면 되는 겁니다. 이건 아마 제가 미드 '가십걸'이나 '베벌리힐즈 90210'에 등장하는 부자동네 사립학교를 못 다녀봐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요. ^^;;

특히 캘리포니아의 여성들은 Laid-back (느긋하고 캐쥬얼한) 이라는 California 특유의 문화 때문에 더더욱 화장을 잘 하지 않습니다. 비단 학생들 뿐만 아니라 직장인 여성들도 옷은 격식에 맞게 입어도 화장은 하지 않아도 이상할 것 없는 일이죠. 덕분에 저도 편하게 입고, 편하게 신고 화장도 잘 하지 않는데요. 몇 년 만에 한번씩 한국에 가서 옛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어익후~ 내가 제일 게으르구나!' 싶어 뜨끔하답니다. 친구들은  하나 같이 예쁘게 꾸미고 다녀서요.


언젠가 미국에 다녀간 친척이 미국 영화 보면 다들 예쁜데 실제 미국인들은 촌스럽다고 웃더군요. 재밌는 얘기를 해 드리자면 미국에서는 정반대로 생각한답니다. 캠퍼스내에서 한국에서 갓 온 학생들을 촌스럽다 여기기도 하거든요. 한국식으로 피부를 하얗게 표현하고 뺨에 블러셔를 바르고 아이쉐도우까지 화려하게 칠하고 마찬가지로 화려한 옷을 입고 구두를 신고 핸드백을 든 채로 학교에 나타나면, 인위적인 것을 싫어하는 캘리포니아 사람들 눈에는 아무래도 조금 어색하게 보이나 봅니다. 하지만 저는 아무리 미국에 살고 있어도 한국 출신이라 그런지 그런 예쁜 옷들은 도대체 어디서 구할 수 있나 미친 듯이 알고 싶고 사고 싶답니다.


포스팅을 마치며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 글은 미국인들의 사고방식이 더 좋다거나 한국식이 더 좋다거나 하는 평가가 아닙니다. 그저 미국에는 이런 문화가 있다는 이야기일 뿐이니 아무쪼록 오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