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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lcome to California

꺽꺽대고 웃었던 이민 15년차 우리 아버지 영어 실수담

by 이방인 씨 2014. 1. 20.

블로그 개설 이래 처음으로 아버지에 관한 글을 쓰는 것 같습니다.
그 동안 저의 오빠는 흥할 인간으로, 어머니는 박여사로 자주 등장했었는데 아버지는 항상 카메오 역할만 하셨잖아요.
저희 가족들은 제 블로그를 읽지 않기 때문에 누가 등장하는지 그들이 알 길은 없지만 어쩐지 불공평한 것 같아 오늘은 작정하고 아버지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최초로 등장하는 아버지의 이야기가 실.수.담.이라는 사실에는 의미를 부여하지 말기로 해요~

본격적 이야기에 앞서 잠시 배경설명이 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화학을 전공하셨는데 적성이 너무 한 쪽으로만 쏠리신 건지 어릴 때부터 영어에는 흥미도 의욕도 없으셔서 시쳇말로 "젬병"이셨다고 해요.
거기에 더해 아버지를 영어 트라우마에 빠트려 알파벳은 쳐다 보기도 싫게 만든 사건까지 하나 있었죠.

아버지가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후의 일이라고 들었습니다.
별로 좋아하지도 않던 영어 시간에 하필이면 선생님의 지목을 받아 지문을 읽게 되신 겁니다!!!
'운도 나쁘다' 생각하며 더듬 더듬 읽어 나가시는데 Chemistry라는 단어가 나왔더랍니다.

Chemistry [|kemɪstri] : 화학

선명하게 보이는 발음기호 ke... 이 단어의 발음은 케미스트리죠.
저희 아버지는 이 단어를 이렇게 읽으셨다구요.


미스트리


그리고 터지는 웃음 소리! (왜 웃는지 모르는 학생들도 분명 있었으리라 확신합니다.)


 이런 망할... 

담배2

Chain는 체인
Chiar는 체어
Chart는 차트

인데 왜 케미스트리냐!!!

 

Christmas는 크리스마스
Chronicle은 크로니클
Charisma는 카리스마

인 것과 같은 이유라고나 할까요???


영어의 불규칙성 때문에 아버지가 아무리 억울하셔도 이미 엎질러진 물입니다.
그 후로 아버지는 20년 이상을 영어 트라우마에 시달리셔야 했으니까요. (그런데 나중에 화학과로 진학하신 건 무슨 얄궂은 운명인지 모르겠습니다.)
미국에 이민 오시기 전까지는 '영어 따위 평생 쓸 일 없다, 흥!' 하고 관심도 없으시다가 15년 전 미국 이민이 결정되고 나서야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셨답니다.
그리고 덕분에 저는 혼자 숨죽이고 꺽꺽대며 웃을 일이 많아졌습니다.


첫번째 - 아버지는 세련되셨다

저희 가족이 처음 이민 왔던 시기에는 한국이 지금처럼 많이 알려지지 않았었습니다.
삼성이나 LG의 휴대폰도, 현대나 기아의 자동차도 지금처럼 대중적이지 않았고 K-Pop이라는 말은 아직 탄생하기도 전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저희는 어딜 가서든 조~금이라도 한국의 흔적을 발견하면 말하지 않고는 못 베겼답니다.
하다못해 마트에서 Made in Korea 양말을 발견했을 때도 어머니와 이렇게 말했었죠.

"엄마, 이 양말 한국산이예요!"

"어머, 진짜네~ 역시 한국산이 좋다~!"

"이거 하나 살까요?"

"그럴까~?"

외국에 나오면 다들 애국자가 된다고 하는데 거기에 이민 초기의 향수병까지 더해져 저희는 한국에 관련된 모든 것에 호들갑을 떨었는데 워낙 과묵하고 무뚝뚝하신 아버지는 그걸 이해하실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어머니와 제가 "한국산이 어떻고 저떻고", "한국이 어떻고 저떻고" 수다를 떨 때마다 아버지는 촌스럽게 요란 떨지 말라고 피식 웃으셨죠.

그러던 어느 날, 저는 거실에서 미국 뉴스를 보고 있고 아버지는 주방에서 어머니와 말씀 중이셨는데 기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 어쩌고 저쩌고 career change 어쩌고 저쩌고 "

이 때 갑자기 주방에서 아버지가 달려오시더니 "방금 뉴스에 한국 얘기 나왔지?!!" 하시는 게 아닙니까?

"잉? 한국 얘기라니요... 그런 말은 단 한마디도 없었는데요..."

"아니야, 분명 한국의 변화 어쩌고 했던 것 같은데??"


Career [kə|rɪə(r)] : 직업, 경력
Korea [kəríə] : 한국

이 두 단어의 발음기호, 어마무지하게 비슷하죠?

저희 아버지는 Career change를 Korea change로 들으셨던 겁니다.

아이구 참말로~ 아부지는 세련되셨다니께요~
마트에서 한국산 물건은 보고도 무심한 듯 넘기시지만 
NBC 뉴스에서 Korea 얘기 career 얘기 나오니까 한걸음에 뛰어오시네요.


두번째 - 누굴 원망해야 합니까

꽤 여러번 언급했듯이 미국에서는 비교적 쉽게 마약을 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놀랐었는데요.
특히 고등학생들도 피울 정도로 흔한 건 한국에서 "마리화나"라고 쓰는 대마초입니다.

Marijuana [|mӕrə|wɑ:nə] : 대마초

영어가 아니라 Mexican Spanish이기 때문에 이 단어를 몰랐던 사람들은 철자만 보면 어떻게 발음해야 할지 확신할 수가 없는데 스패니쉬에서는 J가 "ㅎ"으로 소리나는 게 맞지만 미국식 발음으로는 "매러와나" 혹은 "매리와나"쯤 됩니다.

아무리 미국에 사신다지만 저희 아버지가 밖에서 누구와 마약에 관한 대화를 해 보셨겠습니까?
한국식 표기법대로 "마리화나"라고만 알고 계셨던 듯 한데, 어느 날 제게 미국내 대마초 합법화 찬반논란에 대해 말씀하시다가 "마리화나"라는 단어를 당.신. 생.각.대.로. 영어식으로 발음하시는 걸 듣고 저는 쓰러질 뻔 했습니다.
온 몸의 신경을 집중하며 웃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죠.


아버지는 마리화나를....

마리

라고 발음하셨습니다.


마리나만 됐어도, 제가 그토록 힘들지는 않았을 텐데 왜 하필 마리파나라고 하셨던 걸까요?

 

Family가 훼밀리가 되고
Fighting이 화이팅이 되고
French Pie가 후렌치 파이가 되는

옛날식 영어 때문이죠.

 

옛날식 영어에 익숙하신 아버지는 "마리화나"라는 한국어 표기법을 보시고는 아마 F를 ""으로 썼다고 생각하신 모양입니다.
하여 미국에 왔으니 미국법을 따르시겠다는 다짐으로 아주 지.대.로. 된 F 발음으로 마리나라고 하신 거죠.

여기까지 파악한 저는 속으로 꺽꺽대며 눈물이 고일 정도로 웃었지만 아버지께는 절대 티내지 않았습니다.
왜냐구요?
그 이유는 지난 번에 어머니의 영어 실수를 목격하고도 고쳐드리지 않았던 까닭과 똑같답니다.

2013/10/17 - [방인 씨 잡담 일기] - 재미교포가 엄마의 영어 실수를 고쳐주지 않은 이유

아버지의 실수를 고쳐드리지 않은 이유가 궁금하시다면 위 글을 참고해 주세요~


처음으로 블로그 전면에 등장하신 아버지가 이 사실을 알면 과연 기뻐하실지...

물음표 뿐이네요.



불효녀 이방인 씨는 이만 물러갑니다.

여러분 신나는 한 주의 시작! 유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