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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lcome to California

뻔한 유혹에 넘어가 미국 투표권을 얻게 된 사연

by 이방인 씨 2013. 4. 24.

어제 시민권 이야기를 해서 그런지 제가 시민권 받던 날의 기억이 새삼스레 떠오릅니다.
시민권 인터뷰에 통과하고 나면 그 자리에서 바로 선서식 날짜를 받게 되는데요.
제가 사는 도시가 포함된 관할 구역의 시민권 선서식은 다달이 정기적으로 열리기 때문에 한달 동안 시민권 인터뷰에 통과한 사람들이 모두 같은 날에 모입니다.
제가 갔던 날에는 선서하는 사람들 1090명에 축하객들이 300명 정도로 합이 1400명은 됐었죠.

그 많은 인원을 통제하며 행사를 진행하기가 쉽지 않으리란 걸 충분히 예상했지만 너무 지치더군요.
아침 7시에 일어나 준비하고 갔는데 8시 30분으로 예정된 행사는 늦게 온 사람들 탓에 9시가 다 되서야 시작했습니다.
게다가 정작 선서하는 순간은 몇 분 안되지만 온갖 잡다한 행사가 많더라구요.
어느 나라에서 몇 명이 왔다고 소개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그 나라 말로 인사까지 하고... 휴우~
선서식을 참관하는 담당 판사의 일장 연설과 성공적인 이민자 Guest speaker의 인생극장도 한편 들었네요.
행사를 마치고 다시 천여명의 사람들이 줄을 서서 시민권 증서를 받은 뒤 출구로 나가는데만 또 40여분이 걸렸습니다.
안전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진행요원들의 지시대로만 느릿느릿 움직여 마침내 출구 근처에 이르러 시계를 봤더니 벌써 12시가 조금 지났더라구요.
아침 일찍 일어나 물 한잔 마시고 달려왔더니 위장은 "네 놈이 기어이 날 죽일 셈이냐" 며 난리가 났고 빨리 집에 가서 쉬고 싶은 마음 뿐이었죠.

그런데 귀차니스트에게 번거로움은 날 잡아서 찾아오기라도 하는 건지...
출구를 나서자 마자 양 옆으로 길다란 테이블들이 보이고 테이블 앞에 검은색 티셔츠를 맞춰 입은 사람들이 늘어서 있었습니다.
그들이 입은 티셔츠에는 이런 문구가 쓰여 있더군요.

Register to VOTE today!  오늘 선거인 등록을 하세요!

보자마자 감이 왔습니다.
시민권을 받으면 미국 시민이 되기 때문에 그 전까지 없었던 투표권이 생기게 됩니다.
한번에 천명씩이나 투표권이 생기는 것이니 투표 장려 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놓칠 수 없는 대목이죠.
투표권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선거인 등록이라는 것을 먼저 해야 되는데 혹시라도 귀찮아하는 사람들이 등록을 하지 않을까 봐 문 앞에서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시민권을 얻으면 당연히 선거에 참여할 생각이었지만 Oh please~ 그 날은 너무 피곤했습니다.
선거인 등록이야 우편으로도 할 수 있고 온라인으로도 간편히 할 수 있는데다가 선거철도 한참 남아있었던지라 저는 어떻게든 그냥 집으로 내빼고 싶은 마음 뿐이었습니다.
저 뿐만 아니라 아침 내내 행사 때문에 피곤했던 모든 사람이 다 비슷한 심정이었겠죠.
다들 그냥 빠져나가고 싶어하는 눈치가 역력했습니다.

저도 결연한 의지를 다지고 발을 내딛은 순간 벌써 한 쪽에서 선거인 등록 서류와 볼펜을 들고 한 사람이 다가오더군요.
미안한 듯한 얼굴로 "집에 가서 할게요." 하며 샤샤샥~ 1단계를 클리어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처음이나 그들은 한달에 한번씩 그 곳에 나타나는 베테랑들이었습니다.
그 사람을 지나자마자 이번에는 양쪽에서 한명씩 두명이 저를 에워싸고 서류를 들이밀더군요.
저는 이미 한 손에는 시민권과 함께 각종 안내책자가 들어있는 두툼한 서류 봉투를 들고 있었고 다른 쪽 손에는 핸드백까지 들고 있던터라 팔을 들어 보여주면서 "미안하지만 나중에 꼭 할게요. 걱정 말아요~" 하며 2단계 역시 클리어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정말 약점이 없는 전략을 구사하더군요.
'이제 됐다' 하며 마지막 문에 다다른 순간, 끝판왕이 나타났습니다.

185cm는 족히 돼보이는 훨칠한 키에 옅은 갈색 머리를 멋들어지게 빗어 넘긴 채, 파란 눈을 빛내며 서 있던 조각 같은 거~업~나~ 미남이 말을 걸어오더군요.

 

Miss, do you have a minute?  아가씨, 잠시 시간 있으세요?

하트3그럼요! 있습죠! 있고 말구요!


저는 마치 뭐에 홀린 듯 그 사람이 들고 있는 선거인 등록 서류에 손을 뻗었습니다.
그.런.데. 그 미남은 괜히 끝판왕이 아니었습니다.
제 양손에 다 짐이 들려 있던 것을 보더니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닙니까?

 

그냥 불러 주기만 하면 내가 적을게요.

아이구~ 시상에... 잘 생긴 양반이 착하기도 하지~  쌩유

 

그리하여 제가 입을 나불거리면 그 미남이 받아 적으면서 선거인 등록을 마쳤습니다.
그리고 나서 정말 고맙다고 악수를 해 주며 Have a nice day~ 하는 게 아닙니까.

뭘 또 악수까지 해 주고 그런대... ㅎㅎㅎ덕분에 이미 nice day입니다요. 말해 뭐해~


꿈 꾸는 듯 등록을 마치고 유리문을 빠져 나와 뒤를 돌아보니 저처럼 1,2단계를 클리어한 다른 여성들도 그 미남 앞에서 낚이고 있더군요. ㅋㅋㅋ
주차장에 돌아와서 차 안에 앉았는데 그제서야 후회가 밀려왔습니다.
이런 뻔한 술수에 당하다니 분하다. 하..하지만 불가항력이었어!  엉엉


그 날은 자기혐오에 빠졌었지만 그 때 일찌감치 선거인 등록을 해 놓은 덕에 나중에 아주 편했답니다. ^^
제가 겁나 미남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미국 투표권을 얻은 사연, 어떻게 보셨나요?
여러분 모두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