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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lcome to California

의외로 소심한 미국인 동료들과의 속터지는 고구마 에피소드

심함과 미국인이라...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 단어의 나열입니다. 미국인이라고 하면 "자유"를 무기 삼아 하고 싶은 행동은 해야하고 하고 싶은 말도 내뱉어야 하는 사람들이라는 선입견이 있기 때문이지요. 게다가 "수줍음" 같은 건 평생 모르고 살 것 같은 사람들이기도 하구요.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그런 사람들이 실제로 많.기.는. 하다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반평생을 미국에서 살았는데도 미국인들의 "나는 나고, 내가 하고 싶은 건 뭐든 해도 되고, 나한테 뭐라고 하는 건 다 개인의 자유를 부정하는 행위"라는 세상 자기중심 태도에 질릴 때가 있지요. 

그런데! 또 의외로 소심 of 소심한 미국인들도 있습니다. 

"아니, 그 소심한 성격으로 어떻게 이 사람들 틈에 끼어 고생하며 살았어?"

묻고 싶을 정도로 소심한 사람들 말이죠. 

저도 인간관계에 소심한 사람 중 하나이기 때문에 같은 류의 사람을 보면 친근감이 느껴지는데, 그래서인지 꼭 비슷한 사람들끼리 어울리게 되더라구요. 직장내 부서에서도 용.하.게. 비슷한 사람은 눈에 잘 보여요. 그들 눈에도 제가 잘 보였는지 저는 비슷한 성격을 가진 동료 2명과 자주 어울립니다. 오늘 들려드릴 이야기는 저희 3명에게 우리가 얼마나 소심한지 다시 한 번 느끼게 해준 일화랍니다.

한 석달 전의 일이네요. 미국에는 10월에 "보스의 날"이라는 게 있어서 부하직원들이 상사에게 작은 선물을 하거나 식사대접을 하거나 합니다. 저희 3명도 부서 부장님에게 점심을 대접하기로 했는데, 부장님에게는 저희 3명 말고도 다른 팀장이 하나 더 있습니다. 사실 같은 부장님 밑에서 일해도, 그 동료와는 연령대도 다르고 해서 평소 잘 어울리지 않았는데 그 날은 부장님을 위한 날이니까 4명이 함께 부장님이 가장 좋아하는 레스토랑에서 식사대접을 하기로 했습니다. 

그리하여 나름 화기애애하게 식사를 마치고 계산서를 받았습니다. 5명이 식사했지만 부장님은 오늘의 주인공이니 나머지 4명이 공평하게 나눠 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Tip 금액을 책정하는 것이었습니다. 미국은 어딜 가나 팁을 줘야 하는데, 앉아서 서빙을 받는 식당이라면 대부분 금액의 20%를 팁으로 지불합니다. (서비스 질에 따라 15%, 18% 주기도 하구요.) 예를 들어 5명의 식대가 $100이라고 치면, 팁으로 $20는 줘야 한다는 말이죠. 그 날도 저와 동료 2명은 '20% 주면 되겠지'하고 있는데, 저희랑 교류가 없는 그 마지막 4번째 동료가 갑자기 "$100이니까 팁으로 $40내면 되겠네." 하는 겁니다.

으... 으잉?
팁을 40%나 준다고?
식대가 $100이라 1/4하면 1인당 $25불씩 내고
팁은 20%해서 $20, 각자 $5씩 더해 총 $30만 내면 되는 건데?

왜 팁을 40%나 주자는 거지?
대단한 서비스도 아니었고, 그냥 평범했는데 왜?
왜?
Why?

순식간에 몇 개의 물음표가 머릿속을 떠돌았지만 소.심.한. 저는 나머지 동료들 앞에서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만약 팁을 왜 40%나 주냐고 물었을 때 누군가가 "방인이 너 생각보다 인색하구나?!" 라고 말하면 도대체 어찌 해야 한단 말입니까!! 오 신이시여~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

하여 저는 차마 입을 뗄 수 없어서 가만히 있었는데, 나머지 동료들도 다들 군소리 없이 가만히 있더라구요. 그래서 저는 또 속으로 "내가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건가? 미국인들 사이에서는 요즘 팁을 40%씩이나 주는 건가?" 싶어서 더더욱 입을 꾹 다물었습니다. 결국 저희는 40%의 팁을 남기고 나왔죠. 

아~ 답답해. 고구마도 이런 된고구마가 없구나.

그 후 며칠이 지났습니다. 다시 그 2명의 동료들과 점심시간에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느닷없이 그 중 하나가 이런 말로 포문을 열었습니다.

"그 때 말야, 보스의 날에 점심 먹었던 날, 그 날 우리 팁 엄청 많이 주지 않았어?"

아... ...
이건 끝났다.
이제 막을 수 없음이야.

그렇습니다. 저와 나머지 동료 1명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 40%의 팁에 대해 봇물을 터트립니다. 즉, 저희 셋은 모두 그 팁이 너무 과하다고 생각했으나 차마 말을 꺼낼 수 없었던 겁니다. 소.심.하니까요. 당시에는 단 한마디도 할 수 없었지만, 소심한 사람들끼리 모이면 웅변대회라도 나온 마냥 목소리를 높힙니다. 

"아니, OOO (40%를 제안했던 마지막 동료)는 원래 그렇게 팁을 많이 주나? 그래도 40%는 심하지 않아? 완전 평범한 서빙이었는데 왜 그렇게 줘야 되는 거지?"

"완전 동감. 나 처음에 40% 주자고 그래서 속으로 놀랐는데, 그냥 뭐... 1/4해서 $5 차이니까 그냥 가만히 있었어."

"응. 나도 그냥 아무도 반대 하지 않길래 다들 괜찮은 줄 알고 아무말 안했어."

이리하여 '나만 팁에 쪼잔한 인간이 아니었구나' 또 '나만 소심해서 말 못하는 인간이 아니었구나' 하는 안도감과 '여기 이렇게 국적과 민족을 초월하는 전인류적 소심함을 지닌 인간들이 함께 모였구나' 하는 소속감을 느끼며 만족스런 점심시간을 보냈지요. 그렇게 또 한참을 잊고 지내고 있었는데, 얼마 전에 그 제 4의 동료가 저희에게 말하길,

아니, 그 때 내가 팁 계산 잘못했는데 왜 아무도 말 안 해 준거야?"
계산을 잘못해서 팁을 엄청 많이 줬는데, 아무도 몰랐던 거야? 
니네도 다 산수 못하는 구나? 와하하하하하


그 말을 하고 웃어버리는 동료의 웃음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립니다.

와하하하하하하하하
와하하하하하하
와하하하하
와하하하
와하하
와하

와~~
이런 정말이지...
오늘따라 정중하게 ""자 붙여 불러드리고 싶은 OOO
그 계산을 틀렸다구요?
근데 그렇게 자신있게 얼마 내자고 말했다구요?
그 액수가 이상하다는 생각은 안 들었구요?
산수에 자신 없으면 핸드폰 계산기를 썼으면 좋았을 텐데...


물론 저는 이 중 단 한마디도 입 밖에 내지 못했습니다. 나머지 동료들도 마찬가지지요.

"아, 그랬구나! 아하하하하하. 우리 다들 산수 못하나 봐."

"어떻게 1명도 모른 거야? 아하하하하."

"그러게, 다들 참, 이 머리로 어떻게 직장생활하는지 나 원 참... 아하하하하"

그렇습니다.
소심함과 연기력은 비례하는 것입니다.

제 4의 동료가 가버린 후, 나머지 셋은 허탈한 심정으로 서로를 바라보다 흩어져 제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역시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이불 밖은 위험함을 따지기 이전에 이미 불.편.한. 것이지요. 1인당 $5이 일깨워준 진리랍니다.

여러분, 오늘도 즐거운 하루 유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