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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lcome to California

미국 직장인들의 피도 눈물도 없는 요리 대결!

by 이방인 씨 2019. 12. 6.

이방인 씨의 오래된 독자분들은 익히 아시겠지만 저는 요리 무식 + 무능력자랍니다. 요리도 귀찮고 설거지도 귀찮고, 그저 먹는데만 최적화된 신체와 정신구조를 가진 푸드파이터죠. 오로지 먹고 살려는 일념으로 매일 아침 광광 울며 다니고 있는 직장에서 제가 제일 좋아하는 행사가 바로

Chili Cook-Off
(칠리 요리 대결)입니다.


Chili Cook-Off란 참가자들이 "가장 맛있는 칠리"를 만드는 요리사라는 영예를 차지하기 위해 경쟁하는 대결인데요. 제가 다니고 있는 직장에서는 매년 가을에 이 대회가 열립니다.

 

이 대회를 설명하기 앞서 "칠리"라는 요리를 간단히 소개해야 할 텐데요. 영어로 "Chili"는 고추를 뜻하는 단어이지만 고추가 들어가는 매운 스튜 요리인 동명의 음식을 가리킬 때도 씁니다. 미국 Texas에서 멕시코계 여성이 처음 만들었다는 칠리, 보통 이렇게 생겼습니다.

콩과 토마토를 비롯하여 각종 채소 및 고기를 넣고 칠리로 매운맛을 내죠.
맛을 설명해드리고 싶은데 비슷한 맛의 한국 음식이 떠오르지 않네요. 
매운맛이 추가된 토마토 수프라고 하면 될까요...
콩과 기타 재료를 많이 넣고 걸쭉하게 만듭니다.

 

처음 이 음식을 먹었을 때 민족색이 짙어서 당연히 멕시코 전통 음식이겠거니 했는데, 의외로 발상지는 미국 Texas주였네요. 텍사스 주는 미국화된 멕시코 요리가 잘 발달한 곳으로 칠리뿐만 아니라 Fajita (파히타)도 텍사스에서 처음 생겨났답니다. 미국에서는 텍사스식 멕시코 요리를 Tex-Mex라는 재밌는 표현으로도 부릅니다. 


멕시코 풍이 분명한 요리이기는 하지만, 텍사스에서 시작된 덕분인지 칠리는 미국인들에게 크게 사랑받는 가정식이기도 합니다. 요리깨나 한다는 미국인이라면 자신만의 칠리 레시피 하나쯤은 가지고 있을 정도죠. 그래서 생겨난 요리대결이 바로 칠리 쿡오프인 것입니다! 두둥~

 

저희 회사에서 매년 열리는 칠리 쿡오프는 직원이라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고, 심사는 공정하게 블라인드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칠리 쿡오프가 열리는 날이면, 올해의 칠리왕이 되고 싶은 직원들이 저마다 커다란 냄비를 들고 회사 주방으로 모여듭니다. 요리무식자인 저는 잘 모르지만 칠리는 아마도 뭉~근히 오래 끓여야 되는 모양인지 전날 밤 미리 어느 정도 완성을 시켜놓고, 회사에 출근하여 아침 댓바람부터 칠리를 다시 끓이기 시작하죠. 심사는 어디까지나 공정해야 하기 때문에 누가 어느 칠리를 만드는지 비밀에 부치기 위해 참가자를 제외한 직원들은 아침나절에는 주방 출입이 금지된답니다. 칠리는 꽤나 특징적인 향을 가지고 있는 요리라 아침부터 회사에 칠리 냄새가 풀~풀~ 나서 직원들이 입과 위장을 궁금하게 만들죠.


모든 칠리는 점심시간에 맞춰 완성되는데 (완성되어야 하는데), 그 이유는 칠리 쿡오프날은 모든 직원이 모여 대회에 출품된 칠리로 점심을 먹기 때문입니다. 사실 칠리는 단품으로 먹기에는 부족한 요리라, 대회에 불참하는 직원들이 곁들여 먹을 빵, 칩, 채소, 치즈, 사워크림 등을 준비하여 상차림을 완성합니다. 치즈와 사워크림을 뿌려 떠먹기도 하고, 살사처럼 칩을 찍어 먹기도 하고, 핫도그 위에 칠리를 듬뿍 뿌려 Chili Dog을 만들어 먹기도 하죠.

이런 칠리독으로 훌륭한 정크푸드 한 끼를 먹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전직원이 함께 모두의 건강을 망치며 공동체 의식을 고취시킨 뒤, 가장 맛있었던 칠리가 담겨 있던 냄비에 투표를 합니다. 그 후 선택된 우승자는 요런 상장과 더불어, 향후 1년간 마음껏 거들먹거릴 수 있는 Bragging Rights (자랑할 권리)를 얻게 된답니다. 우승자는 이 상장을 자랑스레 자신의 책상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붙여두지요.


요리무능력자인 저야 참가할 일이 없어서 마음 편하게 먹고 즐기는데, 막상 경쟁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느긋할 수만은 없나 봅니다. 올해 칠리 쿡오프에 참여했다가 낙선한 동료가 제게 와서 불평하기를,

 

이번에 우승한 OOO말이야. 어떻게 우승했는지 알아? 칠리에다가 설탕을 때려부었다니까! 아니, 세상에 설탕 넣어서 안 맛있는 게 어딨어? 난 집에서 가족을 위해 요리할 때랑 똑같이 좋은 재료로 건강하게 만들었는데 설탕 쏟아부은 칠리에게 졌다니 말도 안 돼!

뿐만 아니라 다른 참가자들도 누구누구는 시중에 파는 파우더를 약간 첨가했다느니, 1등한 칠리는 맵기만 하다느니 하면서 은근슬쩍 폄하하기도 하는 걸 보면, 어쩐지 겉으로는 다들 웃지만 속으로는 피 튀기는 경쟁인 게 아닐까 잠시 생각했답니다. 저는 앞으로도 참가할 일이 없을 것 같습니다요.

 

그런데 한 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이제껏 단. 한.번.도. 제가 투표한 칠리가 우승한 역사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요리 못하는 것도 못하는 거지만, 맛도 모르는 건 또 그것 나름대로 심란하군요. -_-;;

 

즐거운 하루, 행복한 식사 유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