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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직장생활

미국 직장에서 상사에게 불같이 화내고도 사과받은 이유

by 이방인 씨 2016. 4. 29.

년에 벌어졌던 일입니다. 제 직장 상사가 저를 그야말로 폭.발.시켰기에 불같이 화를 내고 말았죠. 결국에는 더 높은 직급의 보스가 제게 사과를 하고서야 진화된 이 사건, 한 번 들어보세요.

이방인 씨는 종종 향수 뿌리는 것을 즐깁니다. 외출시 계절에 맞는 향수를 살짝 뿌리면 기분이 상쾌해지거든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직장에 출근하는 평일에는 향수를 뿌리지 않는데, 바로 저희 직장내 No Fragrance Policy (무향 정책) 때문이죠. 향수 냄새를 싫어하거나 앨러지 반응이 있는 사람들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회사에서는 되도록이면 향수 또는 향이 강한 화장품이나 로션 사용을 자제하길 권하고 있습니다. (저는 마을 셔틀버스를 타고 통근을 하는데 버스 안에도 비슷한 내용의 권고사항 안내문이 붙어 있습니다.) 나 좋자고 남들에게 피해 줄 수는 없는 일이라 평일에는 절대 향수를 사용하지 않는 이방인 씨이지만, 사건은 예기치 않게 토요일에 벌어졌습니다.



부서에 처리해야할 업무가 많았기에 울며 겨자 먹기로 토요일 아침에 출근하여 오버타임 근무를 하게 된 방인 씨, 8시까지 출근했더니 평소 50명이 근무하는 부서 사무실이 텅텅 비었더라구요. 저처럼 추가 근무를 하기로 한 직원은 겨우 4-5명 뿐이었습니다. 상사들이 아무리 마감할 일이 산더미라고 압박을 줘도 금요일 5시 땡하면 절대 일하지 않는 직원들이 대다수다 보니 이렇게 일거리가 많을 때는 팀장급 매니저들이 직원들에게 '제~발 토요일에 근무해달라'며 조르곤 하지만 참여율은 늘 저조하죠. 저도 세 번 부탁 받으면 한 번 들어주는 꼴로 토요일 출근을 하는데, 매 번 사무실이 텅텅 비어서 재미도 없답니다. 그 날도 '우리팀 사무실 나 혼자 다 쓰는구나' 하며 가열차게 일을 하고 있는데 그 날 출근한 다른 팀 팀장이 지나가다가 저를 보더니 인사를 하려고 다가왔습니다.

How are you doing today?

I am doing alright. How about yourself?

대수롭지 않게 인사를 하고 다시 일을 하려는데 그 분이 갑자기 제게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닙니까.


방인 씨, 향수 뿌렸군요.

네. 그렇습니다만...

무향 정책있는 거 몰라요?

토요일에는 적용 안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아~ 그래도 지키는 게 좋죠.

... 지금 동서남북 사방에 아무도 없이 저 혼자 있습니다만,

그래도요.


이쯤되니 괜히 시.비.를 거는 것이라는 확신이 든 방인 씨, 슬슬 짜증이 몰려오기 시작합니다. (원래 이 팀장은 부서 내에서 진상으로 유명하거든요.)

정책은 권장사항일 뿐,
강제할 수는 없다고 알고 있는데요.
게다가 토요일에는 적용 안된다는 사실도요.


여기까지 말했더니 입술을 샐쭉하더니만 알았다고 그냥 가버리더라구요. 속으로 '저러니 진상 소리를 듣지~' 하며 다시 일을 하고 있는데 2시간 쯤 지난 후 다시 제 책상으로 다가오는 게 아닙니까. 참고로 이 분은 저와 팀이 다르기 때문에 책상도 머~얼~리~ 떨어져 있어요. 일.부.러. 걸어오는 수고까지 해 주시더니 말씀하시길,


향수 냄새나서 불편하다는 직원이 있네요.

누가요? 향수 뿌린 지 한참 지나기도 했고, 지금 3시간 째 제 옆으로 개미 한 마리가 안 지나가서 심심해 죽겠는데 누가 그러던가요?

누가 불평했는지는 밝힐 수는 없지만 싫다는 사람이 있으니 향수 뿌린 부위를 물로 좀 씻고 오세요.

씻고 오라구요?


이 말을 듣고 폭발한 방인 씨, 벌떡 일어서서 속사포처럼 말했죠.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지금 제 권리침해하는 말씀하신 거 알고 계시죠?


권.리.침.해.라는 말이 나오자 마자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이 상사, 그 때부터 어버버버 변명을 하려고 하더군요. 미국에서는 불법비디오보다 더 무서운 것이 바로 소송! 권리침해는 소송으로 직결될 수 있기 때문에 당황한 거죠. 아마 평소에 제가 생글거리니까 조용하고 얌전한 동양여성으로 알았던 모양인데 이미 열받은 저는 거기서 멈출 수 없었습니다.





추가 근무고 뭐고 이런 엿같은 사무실에서 더 있고 싶지 않네요.
전 이만 집에 갈 테니 월요일에 우리 팀장님하고 면담할 준비나 하세요.



저는 집에 가자마자 저희 팀장님께 이메일로 불만을 제기할 생각이었거든요. (미국 회사에서는 갈등이 생겼을 때 직접대응하는 것보다 매니저를 통하는 것이 보통이예요.)

여기까지 말하고 서류를 정리하기 시작하는데 아니 이 분이 갑자기 후다닥~ 어디론가 뛰어가더라구요. 그러거나 말거나 저는 짐을 다 챙기고 가방을 들고 나가려는데 헛! 이 분이 자기 위의 상사, 그러니까 제게는 하늘 같은 보스를 소환해 온 것이 아닙니까!


쪼르르 가서 고자질을 하다니...
치사함의 레벨이 만큼 높아!


은근히 긴장해서 가만히 서 있는데 덩치도 큰 남자 보스가 다짜고자 입을 여시길,


방인 씨, 진정하고 내 말 들어봐. 뭔가 오해가 있었던 모양인데 내가 대신 사과할게. 이 사람이 말실수를 했네. 그런 의도가 아니었을 거야.


허엇!
사과받았다!


갑작스러운 사.과.말.씀.에 당황한 방인 씨, 어떻게 대꾸할까 고민하느라 입을 다물고 있었는데 보스는 계속 말을 합니다.


이건 분명 이 사람 실수야. 그러니 이만 화 푸는 게 어떨까. 자자, 거기 가방 좀 내려놔봐요.


못 이기는 척, 가방을 내려놓고 저는 다시 한 번 확인을 했습니다.


토요일 추가 근무 시간에, 게다가 주변에 사람 한 명 얼씬도 않는 이 마당에 지금 향수 뿌리고 왔다고 물로 씻고 오라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아..아니... 그러니까 이 사람이 지나친 거지.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내가 관리를 잘 할 테니 그만 진정해요.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저도 더는 얼굴 붉히고 있을 수 없기에, 알았노라 하고 그냥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렇게 일단락되나 싶었지만 그 다음 주 월요일에 출근하여 이 이야기를 팀 동료들에게 들려주자 하나 같이 분기탱천하여 말하길,


아~ 그 진상, 크게 혼내야 하는 건데 그걸 그냥 넘어가면 어떡해! 소송 걸어서 보상 받아야지!


그렇습니다. 미국인들은 타인의 권리침해에 매우 엄격합니다. 향수 냄새를 맡기 싫어하는 사람들의 권리를 위해 무향 정책이 있듯이, 향수를 뿌리고 싶어하는 사람의 권리 또한 존중해야 하는 것이죠. 이 일이 벌어졌을 때, 저는 "물로 씻고 오라"며 괜히 시비를 거는 게 눈에 보여 화를 내긴 했지만 동료들의 말처럼 소송 따위를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 저희 팀 팀장님은 제가 원하면 정식으로 항의를 하고 인사과에 보고하겠노라 하시더라구요. 저는 그렇게까지 하고픈 마음도 없어서 그냥 두시라 하고 말았지만요.

이렇듯 나의 권리, 너의 권리가 모두 소중한 나라이다 보니 상반되는 권리의 충돌로 인한 갈등이 꽤 잦답니다. 아주 사소한 예를 들자면, 버스에서 누군가는 덥다고 에어컨을 켜달라고 하고 누군가는 춥다고 꺼달라고 하면 기사는 난감해서 어쩔 줄 모르죠. 어느 한 쪽 말을 들을 수도 없지만,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그건 또 그것대로 불만이 커지기 때문입니다.

살다 보니 이런 최대의 장점이 곧 최대의 맹점이 되는 나라가 미국인 것 같습니다. 권리존중에 대한 기준이 지나치게 엄격한 나머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때가 많지요. 그리하여 미국은 오늘도 만인의 만인에 대한 소송중!

그러거나 말거나 여러분은 신나는 하루


추신 - 그 팀장은 그 뒤로도 꾸~준~히~ 근면성실하게 진상부리다가 결국 해고 당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