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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lcome to California

추수감사절 이브에 내게 일어난 작은 기적

by 이방인 씨 2014. 11. 28.

는 미국 시간으로 11월 26일 수요일 밤 9시 35분에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원래 오늘은 글을 쓸 계획이 없었지만 몇 시간 전에 제게 일어난 아주 멋진 일을 여러분께 들려드리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해서 참을 수가 없네요.

이곳에서는 11월 27일부터 4일간 Thanksgiving 연휴가 시작됩니다. 미국 최대의 명절이기도 하거니와 나흘씩이나 쉴 수 있는 기회이다 보니 수많은 미국인들이 손꼽아 기다려온 날이죠. 저 역시 10월 말부터 달력을 뚫을 기세로 쳐다보곤 했답니다. 이쯤되면 수요일에 일터에 나간 사람들의 마음이 어땠는지 짐작하고도 남지 않습니까? 빨리 퇴근하고 집으로 달려갈 생각에 아침부터 일이 손에 잡힐 리 없죠. 심지어 아예 월차를 쓰고 출근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랍니다.

 

 

그러나 성실한 하느라 출근한 이방인 씨는 연휴 전에 몇 가지 일을 처리하느라 퇴근시간이 한~~~~참 지난 5시 15분에야 (15분이나 지체하다니!!) 책상에서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5시 25분에 오는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야하는 방인 씨, 서둘러 정류장으로 걸어가는데 하.필. 아는 사람과 마주치고 말았습니다. 오랜만에 만났기에 서로 안부를 묻고 Thanksgiving 계획 이야기도 나누다 헤어지니 아뿔사! 제가 타고 있었어야 할 버스는 이미 지나가버린 뒤였죠. 평소 방인 씨가 통근할 때 타는 버스는 같은 지역을 오가는 네 가지 노선이 있는데 각각의 버스는 1시간에 1대씩 운행합니다. 말인즉, 저는 1시간을 기다려야만 같은 번호의 버스를 탈 수 있는 거죠.

아아~ Thanksgiving 이브에...
이 춥고 어두운 날에...
정류장에 아무도 없는데 나 혼자...
1시간을 기다려야 한단 말인가...

아아~ 이런 망할...
오늘 출근하는 게 아니었는데...

 

근로인 코스프레를 하며 출근해버린 제 자신을 맹렬히 미워하고 있던 찰나 눈 앞에 다른 노선의 버스가 보였습니다. 네 노선이 모두 저희 동네로 가기는 하나 각각 East, West, South, North 방면이기 때문에 평소에 타던 버스가 아니라면 어디에 서는지조차 알 수가 없었죠. 하지만 이미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는데 1시간을 서서 기다릴 수가 없다고 판단한 방인 씨, 눈에 보이는 그 버스에 올라탔습니다. 어쨌든 같은 동네로 가니까 최대한 집에서 가까운 곳에서 내려서 걷거나 혹은 식구들에게 전화해서 pick up을 부탁할 요량이었죠.

그렇게 25여 분을 달려 드디어 버스는 제가 사는 동네로 진입했지만 저희집에서는 꽤 먼 곳으로 운행하더군요. 스마트폰으로 버스 노선도를 검색하니 가장 가까운 곳에서 내려도 한 15분은 걸어야 할 것 같았어요. 깜.깜.하.고. 추.운. 저녁에 말이죠. 어쨌든 최대한 집에서 가까운 정류장까지 타고 가는 와중에 다른 승객들은 하나 둘 내리고 저.만. 혼.자. 남았더라구요!! 버스 안에 혼자 남았을 때 조금 불안해져서 다른 버스를 타게 된 사정을 설명하고 기사 분께 여쭤 보았습니다.


"저는 OOO길에 가려고 하는데 어디 쯤에서 내리는 게 가장 좋을까요?"


했더니 30대 중반 쯤으로 보이는 백인 여성 기사 분이 지도를 보며 설명해 주었습니다. 대충 알 것 같길래 고맙다고 인사를 한 뒤 내릴 준비를 하는데 갑자기 기사 분이 버스 안에 달린 무전기를 집어들더군요. 버스 노선 및 운행을 관리하는 컨트롤 센터와 통신할 수 있는 무전기에 대고 그녀가 한 말은,


"OOO 노선 제시카입니다. 지금 마지막 승객 1명을 태우고 있는데 이 손님이 원래 타던 버스를 놓쳐 내 버스를 대신 탔다고 하네요. 난 이제 정류장 하나만 지나면 차고로 들어가게 되는데 그 전에 이 손님을 집까지 데려다 줘도 될까요?"

 

허엇~! 방금 뭐라고 말씀하셨나이까~?!!!
집까지 데려다 주신다굽쇼?!!


무전 내용을 듣고 제가 놀라고 있을 때 무전기를 통해 컨트롤 센터의 간단명료한 답변이 들려왔습니다.


YES

허엇~! 그래도 된다구요???
다들 친절친절 열매를 드신 것일까?!!!


무전기를 내려놓은 Jessica는 밝은 목소리로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휴우~ 다행이네요. 컨트롤이 허락하지 않아서 당신이 이 저녁에 걸어가야 할까 봐 걱정했거든요. 데려다줘도 되냐고 물어보면서 속으로 손가락을 꼬고 있었어요. 하하하하."


손가락을 꼬고 있었다는 건 이런 제스쳐를 말하는데 꼭 이루어지길 바라는 일을 빌 때 미국인들이 하는 행동이랍니다.

 

 

그러니까 제시카는 저를 꼭 데려다 주고 싶은 마음에, 혹시 통제센터에서 안된다고 할까 봐 마음을 졸이며 속으로 빌었다는 거죠.

 

뭐...뭐지? 이 분 설마   추수감사절의 정령 이신 건가?!!!


저는 감동도 감동이지만 너무 죄송해서 근처 아무데서나 내려주면 된다고 사양했지만 제시카는 "이 버스는 이미 운행이 끝났으니 괜찮다고" 데려다 주겠다고 하는 게 아닙니까. 해서 저는 급기야 말까지 더듬으며 몇 번이고 고맙다는 말을 되풀이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마지막 운행 스케쥴을 6시 5분에 다 마친, 원래대로라면 차고로 돌아가고 있었어야 할 제시카는 6시 14분 경에 저를 저희집 코. 앞.에. 내려주었답니다. (제가 원래 타는 버스도 그렇게 가까이는 안 서요!) 평소 자신이 운행하는 노선을 벗어났기 때문에 길이 눈에 익지 않아 헤매느라 가까운 길을 돌아와서 미.안.하.다. 하며 말이죠.


이 분 정령에서  Angel 로 격상 확정!
여자라도 괜찮다면 날 가져요. 엉엉엉


연휴를 앞두고 제가 그토록 집에 빨리 오고 싶었던 만큼, 제시카 역시 1분 1초라도 빨리 차고로 돌아가 퇴근을 준비하고 싶었을 텐데도 끝까지 웃으면서, 너무 황송해하고 있는 제게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 "It's okay. No problem."을 반복하더군요. 저는 버스에서 내릴 때 90도 인사까지 할 지경이었답니다.

자, 그리하여 이 이야기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나흘 간의 황금연휴를 앞두고 괜~히 출근을 했다.
2. 5시에 칼퇴근해도 될 것을 괜~히 번잡떨며 15분을 더 머물렀다.
3. 길에서 우연히 아는 사람을 만나 만고에 쓸모 없는 수다를 떨었다.
4. 그 결과로 버스를 놓쳤다.
5. 될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아무 버스나 탔다.
6. 춥고 어두운 저녁에 한참을 걸어야 하는 상황에 봉착했다.

 7. 이쯤에서 천사가 강림하시어 추수감사절의 기적을 행하셨다.

8. 정신차려 보니 어느새 집 앞이었다.
9. 와구와구 저녁을 먹으며 생각했다.

루이, 당신 말이 맞았어.

What a wonderful world~


늦은 저녁 제가 겪은 어느 달콤한 친절을 전해 드리며 이만 물러갑니다.
여러분도 wonderful day, 유후~

추수감사절 맞이 '근본 없는 요리'가 월요일에 여러분을 습격!할 예정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