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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lcome to California

미국에서 영어로 말 더듬는 네이티브 스피커를 만났죠

by 이방인 씨 2014. 9. 6.

러분이 이제부터 미국에서 살게 된다고 한 번 생각해 보세요.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걱정이 무엇인가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분명 '영어'도 리스트에 포함되어 있을 겁니다. 자신이 이미 네이티브 수준에 도달했다는 자신감이 있다면 또 모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이라면 이민 초기에는 영어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를 피할 수 없죠.

미국 땅에 도착한 지 십 여일만에 바로 학교에 다니게 된 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선생님이나 아이들의 말을 듣고 대충 감 잡는 건 하겠는데 말이 원하는대로 나오질 않더라구요. 본의 아니게 과묵한 생활을 해야했죠.

꿀먹은 벙어리는 꿀이라도 먹었으니 억울하지나 않을 텐데


먹은 것도 없이 벙어리로 지내려면 당도 떨어지고 속도 타죠.


이민 초기의 어느 날인가, 거리에서 견공을 보고 속으로 '얘는 인간의 말을 못할 뿐이지, 시켜 보면 분명 네이티브일 거야' 하는 생각을 잠시 한 적이 있었습니다. 동물을 보고서도 그런 생각을 했다는 건 그만큼 네이티브들의 영어실력에 대한 확신이 견고했다는 거죠. 아무래도 외국인 입장으로 현지 언어를 배우려니 미국인들의 영어가 부러웠나 봐요. 그런데 사람이 하나의 믿음에 몰입하다 보면 의외로 단순한 착각에 빠지기 쉽습니다. 미국에서 나고 자랐으니 영어도 완벽하리라는 '완벽한 오해'를 하고 있었던 거죠. 그러나 아뿔사!


미쿡인이라고 다 영어가 CNN 앵커 수준인 건 아니더라구요.


분명 토종 한국인임에도 어법과 발음이 부정확하다거나 말이 자연스럽지 못한 사람들이 있둣이, 미국인들 중에도 언어능력 향상 및 교정이 필요한 이들이 있습니다. 제가 만난 어느 교수님처럼요.

이 분은 정~말이지 자신의 직업에 대한 열정과 학생들을 위한 친절봉사 정신으로 똘똘 뭉친 교수님이셨는데, Stutterer (말을 더듬는 사람) 라는 한 가지 약점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말이 그다지 필요하지 않은 직업군이라면 모를까, 거의 매일 다수의 학생들을 상대로 강의를 해야하는 사람이 말을 더듬는다는 건 어찌 보면 치명적 단점일 수 있죠. 솔직히 고백하자면 저도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그 분의 강의에 집중하기 쉽지 않았답니다.

말을 더듬는 데에도 유형이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이 분의 특징은 첫마디를 시작할 때 심~한 버퍼링으로 사람 몸을 들썩이게 하신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면 이렇게요.


, , , ,   저스트 원 투 ~ ~ ~ ~
, , , , ,   댓츠 ~ ~ ~ ~ ~ ~
, , , , , ,   잇츠 낫 ~ ~ ~ ~ ~
, , , , ,   쿧 비
, , , , , , 렛츠  두 프라블럼 넘버~ ~ ~ ~ ~ ~ ~


일단 첫마디만 무사히 넘기시면 그 다음부터는 놀랄 만한 속도로 말을 이어가시기 때문에 문장 처음의 버퍼링만 이겨내면 되지만, 강의 내내 이 과정이 수도 없이 반복되는 거죠. 저는 그 교수님을 좋아했기 때문에 앞에서 "유, 유, 유, 유, 유, 유~" 하실 때마다 속으로 응원을 하곤 했습니다.

핫! 교수님, 지금 차 키 꽂고 안전벨트하고 네비게이션 다 찍은 겁니다!
자, 이제 시동만 거시면 됩니다!!
일단 시동만 거시면 눈 앞에는 오로지 아우토반 뿐입니다요!!!


아마 지켜보는 학생들을 모두 한마음으로 단결시키는 효과마저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약점에도 불구하고 워낙 자상하고 친절한 분이셨기 때문에 많은 학생들이 그 교수님을 좋아했고 교수 평가도 나쁘지 않았지요. 흡사 콜린 퍼스가 주연한 영화 <킹스 스피치>의 강의실 버전이랄까요.

 

영국의 조지 6세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죠.
Stutterer에서 명연설가로 거듭나는 과정을 그려냈습니다.


이 영화를 보고, '타고난 약점이 있어도 두려워 말고 노력으로 극복하면 된다'는 건설적 교훈을 얻을 수도 있겠지만 제가 교수님을 보며 받은 느낌은 그와는 방향이 조~금 다르답니다.


약점을 극복할 수 없어도, 심지어 감출 수조차 없어도,
그를 상쇄할 만한 장점이 있으면 된다.


세상에 약점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부단한 노력으로 약점을 없애거나 그러지 못하면 남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하는 게 보통이잖아요? 하지만 교수님은 직업특성상 수많은 학생들에게 노출할 수 밖에 없었죠. 여쭤본 적이 없어서 교수님 스스로는 어떻게 생각하셨는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제 눈에는 교수님의 장점이 훨~씬 크게 보였답니다. 강의가 인기 있었던 걸 보면 아마 다른 학생들 눈에도 그러했나 봅니다.

때가 때인지라 블로거 이방인 씨의 모습을 돌아보게 되는 요즘, 그 분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저 역시 감추고 싶은 (인간으로서든, 블로거로서든) 약점이나 결함을 그야말로 생면부지의 불특정다수에게 노출하기도 하는데 그것을 뛰어넘을 만한 장점이 무엇이며, 어떻게 특화시켜 여러분의 시선을 분산시킬까?하고 오늘도 가열차게 잔머리를 굴려 봅니다.

모두 신나는 토요일, 유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