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Welcome to California

미국 친구들 왈, "넌 무슨 수로 그런 운이 좋아?!"

by 이방인 씨 2013. 12. 28.

처음 이민을 와서 미국 고등학교에 다닐 때 말이지요...
어영부영 말은 영어로 하는데 그 말 속에 담긴 정서는 영락없이 한국인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한국말을 그~대로 영어로 직역만 해서 한 셈이죠.
그러니 같은 반 친구들은 저의 애매모호한 영어를 자주 들어야 했답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한국에서 잘 쓰는 이 말입니다.


"그냥 운이 좋았지 뭐~"
I guess I got lucky


여러분은 이 말을 언제 쓰시나요?
제가 한국에서 살던 시절에는 반에서 1등 하거나 전교 1등 한 아이들이 친구들에게 축하인사를 받을 때 저렇게 말하곤 했었습니다.
무언가 다른 사람보다 잘 하거나 특출난 성과를 올렸을 때 겸손의 의미로 한국인들이 잘 쓰는 말이잖아요?
(요즘 아이들도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저는 미국 학교에서 1등을 한 적은 당.연.히. 없.지.만. (여기는 석차를 매기지도 않구요.) 간간히 시험을 잘 본 적은 있었습니다.
다들 짐작하시겠지만 특히 수학 시간에는 뭐...


선생님의 'shining star'였다고나 할까요? 후후훗~


아시안들이 수학을 잘 한다는 건 미국 아이들도 다 알고 있기 때문에 수학 시간에 성적을 잘 받아도 아무도 의외라 생각하지 않았는데 어느 날은 딱! 한 번뿐이었지만 영어 시간에 혼자 A를 받은 적이 있었답니다.
(한국인이라고 다 국어 성적이 좋은 건 아니듯이 미국인이라고 다 학교 영어 성적이 좋은 건 아니니까요.)
어찌된 일인지 그런 사태가 발생하자 미국 친구들이 제게 다가와서 "너 도대체 어떻게 한 거야??" 하고 묻길래 저는 자연스럽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I guess I got lucky. (운이 좋았지 뭐.)

신나2


한국이었다면 당연하게 말하고 당연하게 알아듣고 넘어갔겠지요.
하지만 제 말을 들은 미국 아이들은 잠시 혼란에 빠졌습니다.


느낌표

운? 얘가 운이 좋았대!
응? 어떤 운이 좋으면 시험에 A를 받는 거야?
그 운이 뭔데?!


자신이 이룬 성과에 겸손하기보다 오히려 더 부풀리는 문화에서 자란 미국 아이들은 "운이 좋았다"는 제 말을 이해하지 못했던 겁니다.
도대체 어떤 운을 타고나야 시험에 점수를 잘 받는 건지,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하는 건지 의아해하는 바람에 헛웃음이 나왔답니다.
미국인이라도 연배가 있는 사람들이라면 제 말이 어떤 의미였는지 짐작할 수 있었겠지만 아직 고등학생 아이들이니 미루어 헤아리기 힘들었던 거겠죠.

그 일이 있은 후로 저는 운이 좋았다는 말은 쓰지 않고 지냈는데 (아니, 성과를 이룬 게 없어서 쓸 기회도 없었어요.) 아주 나~중에 취미 강좌를 들을 때 한국에서 온, 저보다 7-8살 정도 많은 학생과 수업을 함께 듣게 되었는데 그 분이 과제에서 최고점을 받아서 교수님이 잘했다고 축하 인사를 건네자 대답이...!

"I was lucky."


꺅

나왔다!!!! 겸손의 '운 드립' 나왔다!!!!


아니나 다를까 30대 중반의 젊은 백인 여교수님은 그 분을 똑바로 쳐다보며 "운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요. 정말로 당신 과제가 가장 훌륭했어요. 최고점을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하며 진지하게 말씀하시는 바람에 그 분은 당황한 웃음을, 저는 폭소를 터트리고 말았답니다.
나중에 수업이 끝나고 그 말은 한국에서 겸손의 뜻으로 쓰는 cliché 라고 설명하자 그제서야 교수님은


생각중아아~~~~~~~


하는 얼굴이셨죠.

문화의 차이라는 게 이렇더라구요.
분명 표면적 언어는 통하는데 그 안에 담긴 정서는 '올림픽대로 양방향 정체'라고나 할까요?
해외생활을 함에 있어 말보다 사람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더 필요한 이유랍니다.

신나는 토요일 유후~


미국인이라고 모두 겸손함을 모르는 건 아닙니다. 제 경험에 비춰보면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성과를 최대한 드러내는' 문화에 익숙하긴 했지만 그 반작용인지 겸손함을 '아무나 갖추지 못한 미덕'으로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