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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ything & Everything

[근본 없는 요리] 미국 이민 14년 만에 처음으로 직접 요리한 추수감사절 만찬

by 이방인 씨 2013. 11. 30.

처음부터 돌직구로 말씀 드립니다.
제목에 등장하는 "만찬"이란, 晩餐 (dinner)이 아닙니다.

신창이 이라는 뜻의 만찬이죠.

미국에 이민 와서 이 곳의 공휴일에 맞추느라 추석 대신 추수감사절을 지낸지도 십 여년이 흘렀지만 늘 어머니, 할머니, 이모들이 식사를 준비해 주신 덕분에 저는 가만히 앉아서 밥상을 받는 호사를 누리며 살아왔었습니다.
하지만 올해는 부모님 두 분만 땡스기빙 모임에 가시고 저와 흥할 인간 둘이서 집에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둘 중에 요리실력이 그나마 나은 제가 이번 추수감사절 식탁을 책임져야 하는, 까마귀 5339826마리가 동시에 울어대는 불길한 상황에 봉착하게 된 것입니다!

이리하여 근본 없는 요리사 이방인 씨의 추수감사절 식탁 차리기 미션이 시작되었습니다.

 

 첫번째 - Pumpkin Pie 

가장 먼저 만든 것은 그나마 간단한 펌프킨 파이입니다.
추수감사절 시즌이면 마켓에서 값싸게 팔지만 올해는 "내가 만들어 네게 먹여 주는 것"이라는 생색내기에 목적이 있기 때문에 직접 굽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이 얼렁뚱땅 요리사는 모든 걸 직접 하기에는 함량미달이라 쉬운 작업만 제가 했지요.

호박 파이의 핵심인 호박은 훌륭하게 잘 갈아 캔에 담아 팔고 있으니 그걸 사다가 두 가지 재료만 더 넣으면 됩니다.

 

Evaporated Milk 1/4컵과 큰 달걀 두 개를 풀어 호박과 섞어 줍니다.

 

부드럽게 잘 저어주면

 

 이렇게 보기 좋은 색으로 변하더군요.

 

9인치용 파이 크러스트를 팬에 잘 붙이고

 

호박 믹스를 붓습니다.

 

 오븐으로 들어갑니다.

 

약 1시간 후의 모습입니다.

윤기가 좌알~좌알~ 흐르는 것이 뭔가 해낸 기분이야!

즐거워

 

여덟 등분하고 생크림을 무시무시하게 얹어 담아내면,

먹을 수 있는 모양새렷다!

 

 

 두번째 - Sweet Potato Casserole 

고구마와 마쉬멜로우의 운명적 랑데뷰~ (근본 없는 말솜씨!)
고구마 캐서롤도 초간단합니다.

 

주황색 미국 고구마를 삶은 뒤 잘게 조각내어 으깹니다.

 

미국인들은 여기에 꿀 등을 첨가해 달게 만들지만
언젠가 얻어 먹었던 고구마 캐서롤이 너무 달아 혀가 아플 지경이었던 저는 아무것도 넣지 않았어요.

 

오븐용 그릇에 잘 담고

 

견과류를 듬뿍 넣어 줍니다.

 

그 위에 마쉬멜로우를 더 듬뿍 올린 뒤

 

오븐으로 직행~

 

30분 정도 구우면 이렇게 브라운으로 변합니다.

아~ 매우 3D스럽다.
안경 끼면 마쉬멜로우가 입으로 튀어 들어올 것 같아~


다 구워질 때 쯤 되면 주방 안에 달콤한 마쉬멜로우 구운 향기가 퍼져요~

 

겉은 구워져서 바삭한데 손으로 집어서 뒤집어 보면
속은 부드럽고 쫄깃쫄깃하게 녹아 있습니다.

이건 본 적이 없는 그런 아름다움
빨간 동그라미를 칠 정도의 흥분!

 

마쉬멜로우가 너무 맛있어서 몇 개 집어 먹었더니 이렇게 쥐 파먹은 모양이...

 

흥할 인간에게 잘라 주었더니 역시나 바로 마쉬멜로우를 집어먹네요.

 세번째 - 드디어 그것! 

파이와 캐서롤을 다 만들었으니 이제 칠면조를 구울 차례입니다.
고작 두 명이서 먹을 건데 손이 크신 저희 어머니 이번에도 14파운드나 (6.35킬로) 나가는 거대한 칠면조를 투척하고 가셨습니다.

 

전 날 이미 물에 담가두어야 한다기에 그렇게 했는데
칠면조 무게에 물까지 더해진 이 거대한 대야를 들다가 손가락 나갈 뻔 했어요.

작년에는 간장구이를 시도했었는데 올해는 이걸 이용해 봤습니다.

 

제가 참 좋아하는 파파존스의 갈릭 소스가 집에 많이 있었거든요.

생각중

 그래, 올해는 마늘구이다! 

 

열심히 발랐습니다.
안까지 잘 스며들으라고 구멍까지 뽁뽁 내가며 고루 발랐다고 생각했죠.

 

그리고는 오븐 전용 백에 곱게 싼 후 트레이에 넣어

 

들어갔습니다.

이제 약 4.시.간.만. 기.다.리.면. 먹을 수 있어요.

 

오븐에 넣은지 한 10분 쯤 됐을 때 궁금해서 (벌써?!!!)
안을 들여다 보다 무언가 석연치 않은 쌔~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칠면조 포장에 써 있던 굽는 방법에는 분명히
칠면조 "가슴살이 위로 오게 놓고" 라고 적혀 있는데
.
.
.

위로 세 칸 올라가서 오븐 백에 담은 사진을 한 번 다시 봐 주세요.

날개가 위에 보이는 것을 보니 저는 등을 위로 오게 넣었지 뭡니까...

그래도 이 정도만 엇나간 게 다행이죠.

 

10분 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부랴부랴 오븐 장갑끼고 다시 꺼내 한 바퀴 뒤집었습니다.
이제 통통한 가슴살이 위로 올라왔네요.

 

 네번째 - Mashed Potato 

칠면조가 다 구워질 때까지 매쉬드 포테이토를 만듭니다.
감자를 삶고 으깨고 하는 과정 따위는 So So Cool~ 하게 생략합니다.
Mashed Potato Flake라는 게 있거든요.

 

 물, 우유, 마가린, 소금을 넣고 끓입니다.

 

마가린이 녹고 있군요.

 

앗, 그런데 갑자기 이것이 무섭게 끓어 오르더니
마치 나일강이 범람하듯 냄비를 넘어 밖으로 마구 쏟아집니다.

직감했습니다.

 또 뭔가 저질렀구나!

 

황급히 요리법을 보니,

물, 마가린, 소금만 넣고 끓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끓으면 불을 끄고 그 때 찬 우유를 부어야 한다고...

아~ 난 왜 꼭 진창에 발이 빠져 봐야 장화의 필요성을 깨닫는단 말인가...

담배2


설명서든 매뉴얼이든 안 읽는 버릇을 못 고치는 이방인 씨랍니다
.

우유가 끓어 넘치는 광경을 보고 잠시
'처음부터 다시 할까?' 생각했으나 어차피 저는 매쉬드 포테이트를 싫어해서 안 먹기 때문에
이대로 진행하자! 는 마음으로 계속 나아갔습니다.

 

이미 권장조리법과 결별하고 독자노선을 걷기 시작한 액체에 mashed potato flake를 투하합니다.
되는대로 마구 저었더니...

 

매.우. 그.럴.듯.하.도.다.

오케이

이대로 주기로 결정~

 

 다섯번째 - Gravy 

칠면조와 매쉬드 포테이토에는 빠질 수 없는 그레이비 소스도 제가 할 일은 별로 없습니다.

 

그레이비 소스 믹스를 냄비에 넣고

 

천천히 물을 부으며 잘 저어주면

 

너무 진해!!!

분명 계량컵을 이용해 넣으라는 만큼 넣었지만
미국인들이 짜게 먹어서 그런지 맛이 강하더라구요.

 

그래서 무작정 우유를 마구 부었어요.
왜 우유인지는 저도 몰라요.
그냥 근본 없는 감 (feeling)이 제게 이렇게 속삭이더라구요.

서양 요리 소스에는 대충 우유 때려넣으면 되는 거야~

 

이렇게 완성된 매쉬드 포테이토와 그레이비가 흥할 인간에게 서브되었습니다.

 

 여섯번째 - Baked Potato 

매쉬드 포테이토를 좋아하지 않는 저 자신을 위해 통감자 구이를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Russet Potato라는 엄청난 크기의 감자를 준비했죠.

 

이걸로 머리통 맞으면 기절할 것 같은 크기랍니다.

 

오븐에서 폭발하지 않도록 포크로 사방에 구멍을 내 줍니다.

 

사이좋게 그릇에 담고

 

오븐이 하나 뿐이니 칠면조 윗 칸에 꾸역꾸역 넣습니다.
불이 아래에서 올라오니 칠면조에 막히겠지만 오래 넣어두면 되겠죠.

뭐... 아니면 말구요.

 

보통 한 시간이면 된다는데 아무래도 칠면조 위에서 구워서 인지 두 배 이상 걸렸네요.
감자도 오래 구우니 고구마처럼 진액이 나오더라구요.

 

그릇에 담고 반을 가르니 갑자기 증기가 쓔~융~ 나오는 바람에 깜짝 놀랐답니다.

 

치즈를 솔솔 뿌리면 그 열기에 바로 녹을 줄 알았는데
예상외로 아무 변화가 없어서

 

감자를 한 번 닫았다 열었더니 이제야 됐네요.

이것도 아마 오븐에 있을 때 막판에 치즈를 추가해야 하는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저는 표준조리법을 파괴하니까요.

 

무척 사랑하는 Sour Cream도 거침없이 올리구요.

 

실파를 썰어 살짝 얹어주면 완성~!

맛은 뭐... 두 말하면 입 아프게 끝내줍니다.
이건 누가 해도 실패할 거리가 없는 간단한 음식이기 때문이겠죠.

 

 일곱번째 - 그 외 

 

먹고 싶은 건 뭐든지 넣고 보는 이방인 씨표 무형식 샐러드

 

크랜베리 소스까지 준비하고 나면 이제 칠면조만 남았네요.

 

 성공이냐 실패냐 

추수감사절 만찬의 중심은 역시 칠면조죠.
마늘구이 칠면조가 어떤 모습으로 나왔는지 궁금하신가요?

 

일단 가슴살의 색을 보아하니 알맞게 잘 구워진 것 같습니다요.

두근두근하며 오븐 백을 벗기려는데...
벗기려는데...
벗기려는데...

 

백을 벗으랬지,
껍질 벗으랬냐?

흥4

마늘 소스의 잘못인지 오븐 백의 잘못인지
아니면 가장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저의 잘못인지
백이 칠면조 표면에 다 눌어 붙었더라구요.

 

다리 부분을 떼어내려다 칠면조가 거의 알몸이 되었어요.

손님 없이 저희 둘만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습니다.
이 꼴의 칠면조를 대접할 순 없으니까요.

 

옆에서 보고 있던 흥할 인간까지 손을 보태 힘겹게 백을 다 떼어내고 난 뒤 단촐한 식탁으로 옮겼습니다.

 

반나절 동안

"앗" "엇" "헉" "이게 아닌 것 같은데?" "이건 또 왜 이래?"

를 연발하며 준비한 것 치고는 젓가락 갈 곳이 없는 허무한 상차림이네요.

 

하지만 뭐든지 주는대로 불평없이 "맛있다"며 먹는 미덕의 사나이 흥할 인간은 (간만에 칭찬?) 칠면조, 매쉬드 포테이토, 샐러드, 고구마 캐서롤까지 모두 "엄마가 한 거보다 더 맛있네"라는 거짓말을 하며 잘 먹더라구요.

땡스기빙 모임에서 미국 요리는 물론이고 불고기, 킹크랩, 각종 전까지 포식하고 돌아오신 부모님께서 "잘 해 먹었어?"라고 물으시기에 "아유~ 그럼~! 말해 뭐해~"하고 웃었지만 어머니께 이 사진을 보여드리지는 않았답니다.
왜냐하면요....


진짜 말해 뭐해...

 

근본 없는 요리사 이방인 씨의 만신창이 추수감사절 요리 이야기였습니다.

여러분 즐거운 토요일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