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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이야기

미국인에겐 난해한 한국의 두 가지 관습

by 이방인 씨 2013. 3. 5.

미국에 살며 새로운 일을 보고 듣고 배우면서 놀라움을 넘어서 머리속이 아득해질 정도로 충격을 받은 적도 꽤 있었는데요.
처음에는 오로지 내가 느끼는 이질감에만 집중했었는데 미국 생활에 익숙해지고 나니 세계 각국에서 온 이민자들로 북적이는 캘리포니아에 사는 미국인들이 외부인들로부터 받는 문화충격도 만만치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미국 밖의 일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미국인들도 많지만 간혹 저만 보면 아시아/한국은 어떻냐며 질문공세가 끊이질 않는 미국인들도 있기 때문에 저도 그들에게 제법 신기한 세상의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었답니다.
오늘은 충격이랄 것까지는 없지만 미국인들의 상식으로 납득하기엔 너무나도 '외국스러운' 한국식 관습 두 가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첫번째 - 어떻게 렌트비도 안 내고 합법적으로 남의 집에서 살 수 있어?

렌트비를 안 내고 남의 집에서 합법적으로 살 수 있는 방법, 뭐가 있을까요?
친한 사이라면 사정 좀 봐달라고 그냥 얹혀 사는 것도 가능하겠죠.
그것 말고는 다른 정당한 방법이 없어 보이는데요.

갑자기 왜 공짜로 남의 집에서 사는 방법을 묻냐구요?
제가 한국의 '전세' 제도에 대해 설명해주었을 때 미국인의 반응이 이랬답니다.

 

와우~ 그러니까 결국 돈 한 푼 안 내고 공짜로 남의 집에서 살 수 있다는 거잖아?!

 

아시다시피 집 주인에게 렌트비로 지불하는 전세금은 집에서 나갈 때 고스란히 돌려받는 돈이잖아요.
물론 세입하여 사는 동안 큰 돈을 집 주인에게 무이자로 대출해주고 있는 셈이지만 집에서 나올 때 렌트비를 전액 돌려받는 것도 사실이니까요.


(citybuild.seoul.go.kr)

 

전세제도가 한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에도 있는지 모르겠지만 미국인들에게는 듣도 보도 못한 일이랍니다.
여기서는 집을 구매하거나 지불하면 돌려 받을 수 없는 렌트비를 내는 방법 뿐이니까요.
저희 가족도 10년 전 집을 사기 전에는 한달에 150만원 가량을 내며 3년간 월세살이를 했었는데 월세 150만원으로 3년이면 5400만원이잖아요.
더 큰 목돈이 들어가더라도 전세가 있었다면 전세집을 얻었겠지만 하는 수 없이 3년 동안 월세로 들어간 그 돈과는 Bye Bye 했죠.

그러고 보면 한국의 전세제도는 집주인과 세입자 모두에게 득이 많은 방식인 것 같아요.
주인은 무이자로 큰 돈을 대출 받는 셈이고, 세입자는 돈이 묶여 있긴 하지만 결국 원금손해는 안 보면서 집을 렌트할 수 있잖아요.

아, 그런데 요즘은 전세값이 과도하게 많이 올라서 서민들에게 큰 부담이 되고 있다고 하니 해결해야 할 문제겠네요....

 

두번째 - 한국 사람들은 그렇게 사람을 잘 믿어?


한국 사람이라고 사람을 잘 믿는 것이 아니라, 그건 개인의 성향에 달린 일이겠죠.
그런데 이 질문은 또 어떻게 튀어나온 것이냐면요...

한국식 자산운용방법(?)계(契)에 대해 알려주었더니 법적 절차도 없이 뭘 믿고 한 사람한테 돈을 맡기냐고 묻더라구요.

 

(munhwa.com)

 

원래 이웃끼리 의심없이 살던 옛날부터 내려오던 방법이라 그렇다고 설명했지만 사실 저도 자신있게 말할 수는 없었습니다. ^^;;
만약 돈을 관리하는 사람이 몰래 빼돌리거나 모른 척하면 어떡하냐는 물음에,

 

그러니까 믿을 만한 사람들하고 해야지...!

 

라고 대답하긴 했지만, 의리보다 법을 더 믿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미쿡인답게 쉽게 수긍하지 않더라구요.

 

아무런 법적 안전장치도 없이 한 사람에게 큰 돈을 맡기는 건 위험하지 않아?

의심하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으니까 처음 시작할 때는 다 사람 믿고 하는 거지. 물론 나중에 사기 당하는 사람들도 있긴 있지만 아무 탈 없이 곗돈 타서 유용하게 쓰는 사람들도 많아.

 

이렇게 말해줘도 돈에 철저한 이 미쿡인은 만약 불상사가 생기면 어떡하냐고 계속 걱정하네요. ㅋㅋ

아오~ 고마해라이건 마치 시작은 있지만 끝은 없는, 처음에는 재밌지만 결국은 짜증나는, 하면 할수록 모두를 혼란스럽게 하는 돌림노래 같은 시츄에이션?

그래서 저는 결국 내가 지금 너에게 한국의 계(契) 문화를 이해시키려고 하는 게 아니라 그냥 이런 풍습도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 뿐이라며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습니다.

그리고 미쿡인은 마지막으로 제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럼 너도 계 해 본 적 있어?

 

아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에~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25년 전, 저희 할머니께서 가까운 친척분이었던 계주에게 어마어마한 사기를 당하신 일로부터 저희 집안의 이민 역사가 시작되었지요....
장사하시던 할머니는 그 일로 재산을 거의 잃으신데다가, 깊은 배신감에 그 계주가 있는 한국땅에 있기도 싫으시다며 미국으로 건너 오신 거랍니다.
그 후로 저희 집안에는 뭘 해도 좋으니 계만은 들지 말라는 불문율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는, 전설따라 삼천마일~~ 을 날아 태평양을 건넌 이야기네요. 후후훗~

생각해 보면, 그 때 그 계주가 돈을 들고 도망가지 않았더라면 저희 가족들은 모두 한국에서 살고 있었을테니 인생이 어떻게 달랐을지 모를 일이예요. ^^
그러면 지금 이렇게 여러분과 이야기하고 있는 제가 없었을지도 모르겠네요.
할머니의 아픈 과거와 이방인의 블로그를 맞바꾼 셈입니다. (이것은 거의 범죄수준의 비약!) ㅋㅋㅋ

눈물과 웃음이 뒤섞인 운명에 감사하며, 여러분 모두 좋은 하루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