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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이야기

한국인들은 과연 인종차별주의자들일까?

by 이방인 씨 2013. 1. 31.

제가 며칠전에 썼던 백인들의 말버릇에 관한 글 기억하시나요?

2013/01/24 - "난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야!" 자기방어 혹은 뻔한 거짓말?

사실 그 글의 주제는 일부 백인들이 "난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야" 라고 대놓고 말하는 이유가 궁금하다는 것이었는데 몇몇분들이 "인종차별은 한국인이 더 심하게 한다" 는 댓글을 써 주셨습니다.
그런데 또 예전에 제가 미국에서 당한 인종차별에 경험에 대한 글 밑에는 "한국의 인종차별은 심하지 않다"는 의견도 있더라구요.

2012/02/22 - 인종차별, 직접 당해보니 눈물 나더라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인종차별 절대 안한다는 분도 계실 것이고, 속으로 뜨금한 분도 계실 것이고, 혹은 한국인은 그렇지 않다고 항변하는 분도 계실 것 같은데요.
저 역시 한국에서 나고 자란 사람으로서, 한국인 모두가 그렇다고는 할 수 없지만 사회 전반적으로 우리보다 피부가 어두운 사람들을 얕잡아 보는 인식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바로 오늘 제가 이 글을 쓰게 된 계기가 있었습니다.
한 인터넷 게시판에 올라온 여성 연예인의 사진 밑에 이런 댓글이 달렸더라구요.

 

예쁜 애를 왜 이렇게 해놨어? 완전 동남아삘 나네.

 

"동남아삘" 이라는 게 어떤 느낌인지 모르는 사람이라도 이 문장의 앞뒤를 살펴보면 결코 좋은 뜻으로 쓰인 말이 아니라고 알아챌 수 있습니다.
이 밖에도 사람의 외모를 평가할 때 '동남아 스타일' 이라는 표현을 쓰는 사람들이 꽤 있더라구요.
아마 여러분들도 한두번쯤은 이런 단어를 들어보셨을 것 같습니다.

겨우 그 말 한마디 가지고 인종차별주의를 논하는 건 지나치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인종차별이라는 게 꼭 타인종을 핍박하고 멸시하고 불이익을 주는 것만이 아니겠지요.

우리가 일상 속에서 그들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역시 인종차별을 알 수 있는 척도 아닐까요?

예쁜 연예인의 외모를 망쳐놨다는 의미로 쓰인 단어가 "동남아삘" 이라는 것, 그리고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설명하지 않아도 알아듣는 것을 보면, 그 사람들이 평소에 동남아인들의 외모를 한국인보다 못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게다가 그런 인식은 비단 외모에 국한된 것이 아니겠죠.

제가 한 7-8년 전에 미국에서 들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어느 날 집에서 TV로 미국의 시트콤을 보고 있었는데 극 중 백인 남자주인공이 어떤 여성을 묘사하는 장면이 나왔습니다.
하나 둘, 그녀의 특징을 설명하다가 갑자기 이런 말을 하더라구요.

 

그리고 그녀는 14살 짜리 한국 체조선수같은 몸매를 가졌어.

 

대사가 끝나자마자 방청석 (미국 시트콤은 방청객이 있는 스튜디오에서 녹화를 하기도 합니다.) 에서 한바탕 웃음이 터지더라구요.
TV를 보고 있던 저는 이게 과연 좋은 뜻으로 한 말일까, 나쁜 뜻으로 한 말일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14살 짜리 한국 체조선수의 몸매가 어떻다는 걸까? 체조선수의 몸매라고 말할 거면 그냥 체조선수라고 하면 되지 그 앞에 굳이 "한국" 를 넣은 이유가 뭘까?
한국인인 나도 14살 짜리 한국 체조선수의 몸매에 대한 특정 이미지가 없는데 웃음을 터트린 미국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생각하고 있다는 걸까???

 

그 장면의 웃음 펀치라인이 그 대사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왠지 썩 좋은 뜻으로 쓰인 것 같진 않았죠.
날씬하다는 의미로 썼다고 해도 박장대소한 사람들의 반응을 보니 개운치 않은 느낌이었습니다.
마치 한국의 예능프로그램에서 일부러 촌스럽게 꾸미고 나와 '중국인' 같다는 말을 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라고도 할 수 있겠죠.

'동남아삘' 과 단순비교를 할 수는 없겠지만, '14살 짜리 한국 체조선수' 가 농담의 소재가 된다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 유쾌한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들이 평소에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의구심을 품게 되는 일이기도 하구요.
실제적으로 차별을 하는 것 뿐만 아니라 이런 일상의 사소한 '인종차별적 습관' 이 사라지지 않는 한, 아시안을 무시하는 백인들은 없어지기 힘들지 않을까요?

우리도 마찬가지라고 생각됩니다.
싫든 좋든 이미 한국 남성과 동남아 여성들과의 결혼은 더 이상 신기한 일이 아니고, 이주 노동자들도 흔히 볼 수 있게 된 이상 한국 역시 다문화 사회로 접어들고 있다고 할 수 있겠죠.
그러나 '단일민족' 으로 살아온 역사가 오래라 그런지 그들을 대하는 어떤 한국인들의 모습은, 인종차별적 습관을 가진 백인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미국에서 살아 보니, 이 나라는 인종차별에 대해 가장 강력한 처벌을 하는 곳이면서도 '습관적 인종차별' 은 너무나 만연한 나라였습니다.
농담인 척 하면서 타민족을 웃음거리로 만드는 일이 비일비재한 곳이죠.
그러면서 정작 처벌 받을까 무서워 미리부터 "난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야" 라고 내뱉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어서 쓴 글이 지난번 포스트였습니다.

이제 다문화 사회로의 변화가 막 시작된 한국의 미래 모습은 부디 미국과는 다르기를 기대해 봅니다.
농담으로 하게 되는 말이라도, '만약 다른 나라 사람이 "한국인"을 빗대어 이런 말을 하면 우리의 기분은 어떨까?' 먼저 생각하는 것이 인종차별을 타파하는 첫 걸음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제목으로 쓴 질문 "한국인들은 과연 인종차별주의자들일까?" 의 대답은 모두가 한번쯤은 고민해 봐도 좋을 화두가 아닐까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좋은 하루 보내세요~

글에서 지칭하고 있는 "미국인" "백인" "한국인" 은 보편적 통칭일 뿐, 일반화의 의도가 없음을 알려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