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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lcome to California

금발 파란눈 남학생과의 씁쓸한 추억, 겉만 보곤 몰라요.

by 이방인 씨 2012. 3. 16.

온 가족이 미국으로 이민가게 되었다는 사실은 안 건, 제가 교복입은 단발머리 여학생 시절이었습니다.
강원도의 작은 마을에서 살고 있던 저는 그 때까지 미국인은 커녕, 그 어떤 외국인도 만나본 적이 없었습니다.
나이가 나이니만큼, 이민이라는것이 얼마나 큰 인생의 변화인지 깨닫지도 못하고 친구들과 철 없이 떠들면서 입버릇처럼 하던 얘기가 바로, 
 

미국가면 사람들 다 금발에 파란눈 아냐? 그럼 나중에 남자친구도 금발 파란눈???


죽을만큼 부끄럽지만, 이해해주세요...^^;; 겨우 중학생이었어요.

미국 공항에 내리자마자, 여기사람들이라고 다 금발에 파란눈은 아니네 하고 깨달았죠.
그래도 제가 미국 고등학교에서 처음 만난 수학시간의 짝궁이 금발의 파란눈 소년이었답니다! 
제가 그 날 집에와서 엄마에게 호들갑을 떨 정도로, 여자인 저보다 예쁜 아이였죠.
게다가 이름은 무려! Gabriel, 가브리엘은 천사 이름이잖아요!

미국 아이다보니, 저보다 수학을 못하는 바람에 그 당시에는 영어도 더듬더듬하던 제가 한국말도 툭툭 섞어가면서 수학을 가르쳐주곤 했었죠.
솔직히 저는 그 아이를 엄~청 좋아했었는데요. (여고생인 제가 한눈에 반할만큼 예뻤거든요. ^^;)
어느 날, 제 환상이 와르르 무너져내리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제가 이민 간다고, 한국 친구들이 선물로 준 소중한 샤프펜슬을 항상 필통에 넣어가지고 다니곤 했는데요.
그런데 하루는 필통을 뒤집어보고, 가방을 다 찾아봐도 샤프가 안 보이더라구요.
도대체 어디 간걸까 속을 끓이는데 바로 옆 자리에서 가브리엘이 내 샤프를 쓰고 있는게 보이더라구요!


뭥미어째서? 왜? 난 빌려준 적이 없는데? 

 

그거 내거 아니냐고 물으니까, 처음엔 아니라고 하더라구요.
분명히 미국엔 없는 샤프고, 게다가 Made In Korea 라고 써 있는 걸 보여 줬더니 그제야 미안하대요.
나중에 한 학기가 끝나갈 무렵에야 자세히 알았지만, 그 천사의 얼굴로 이름마저 천사인 가브리엘은 학교에서 행실이 안 좋기로 유명한 아이였어요. ㅠ.ㅠ

철 없던 시절, 제 마음을 온탕과 냉탕을 오가게 만든 가브리엘의 이야기를 털어놓은 이유는, 그가 제게 미국인들을 겉모습으로 판단하면 절대 안된다는 교훈을 준 첫번째 사람이기 때문이죠.

미국은 그야말로 온갖 개성의 총집합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남들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유행에도 관심없는 개성파들이 많은 나라지요.
그러다보니 마음속에 어느 정도의 '외모 표준' 이 있는 한국인들의 눈으로 보면, 기함할만한 꼴로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도 처음엔 그런 사람들이 거북하고, 심지어 무섭기까지 하더라구요.
그런데 가브리엘과 마찬가지로 그런 사람들중에도 겉모습만 가지고는 진가를 알 수 없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두번째 사람 - 얼굴만 봐도 턱이 덜덜 떨렸던 스킨헤드 아저씨

Skinhead 라는 말은 Skin 과 head 를 붙인 단어로, 머리가 피부로 된 사람, 즉 빡빡민 헤어스타일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죠. 
하지만 머리를 밀었다고 아무나 스킨헤드인 것이 아니라, 주로 이런 느낌의 남성들입니다.

 

 

이제 감이 오시죠?
사진은 비교적 순한 걸로 올렸습니다.
사실 더 무시무시한 외모의 스킨헤드도 많거든요.

제가 대학에서 일본어 강의를 들을 때, 이런 스킨헤드의 아저씨가 있었습니다.
박박 밀은 머리에 문신이 있고, 귀걸이는 또 왜 그렇게 크며, 더 무서운건 소도 아닌데 왜 코뚜레를 하고 있는 건지 말입니다. ㅠ.ㅠ
태어나서 그런 사람을 처음 본 저는 어쩌다가 마주칠 때면 어찌나 무서운지 온 몸이 다 굳을 지경이었어요.
그래서 의식적으로 이 아저씨를 쳐다보지도 않고, 늘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요.

그러던 중에 이 아저씨의 이상한 습관을 눈치채게 되었습니다.
외국어 수업이니까 아무래도 학생들한테 말하는 연습을 많이 시키는데요.
이 아저씨, 선생님이나 다른 학생들이 말만 시키면 얼굴이 새빨게 지는 거예요.
얼굴부터 시작해서, 목, 귀, 심지어 박박 밀은 머리까지 잘 익은 토마토 마냥 빨게지는 게 아닙니까?
처음에는 이 아저씨 말 시켜서 열받았나봐! ㅠ.ㅠ 했는데, 그게 아닌 것 같더라구요.
자세히 봤더니.....자세히 봤더니.....이 아저씨 수줍음을 엄청 타는거에욧!!!!

말도 안돼! 웃기지 마시라구!! 그런 외모로 수줍음이 가당키나 해요?! 아저씨! 헐

 

교실에서 누가 "How are you today?" 라고 인사만 건네도, 머리끝까지 빨게 지면서 고개를 푹 숙이고 개미만한 목소리로 "아임 파인, 땡큐" 이러는 거예요!
아저씨의 말도 안돼는 수줍을을 간파한 뒤로, 저는 아저씨를 막 대하기(?) 시작했습니다.
틈만 나면 쳐다보고, 쉬는 시간에는 옆에 가서 말 걸고, 장난치고 말이죠.
생각해 보세요!
코에는 코뚜레, 귀에는 엄청 굶은 금속 링 귀걸이, 양 팔에도, 목에도 문신, 박박 밀은 머리에도 문신이 있는 아저씨가 말만 걸면, 완전히 16살 소녀처럼 얼굴의 혈관이 모두 터진 듯 빨게 지는 거예요.


이거 이거 장난 안 치고 넘어갈 수 있습니까요?? 우하하



나중에 친해져서 물어봤더니, 원래 본인은 어릴 때부터 수줍음이 아주 많았다고 하시더라구요.
그래도 사람들하고 친하게 지내는 건, 부끄럽지만 싫지 않다고 해서 나중엔 그 수업을 듣는 학생들 3-4명이랑 아저씨랑 같이 놀러도 가고, 밥도 같이 먹고 그랬어요.
그리고 언젠가 제 차가 잠시 고장나서 엄마가 학교로 데리러 온 적이 있는데, 저희 엄마랑 인사할 때도 얼굴이 폭발하는줄 알았어요! ㅋㅋ

알고 보니, 너무 섬세하고 상냥했던 그 아저씨 덕분에 저는 스킨헤드들에 대한 무서움이 많이 사라진 건 물론이고, 역시 사람은 겉모습으로 판단하면 안된다는 교훈을 다시 한 번 깊이 깨닫게 되었죠.
지금 생각 해도, 다시 만나고 싶은 친구 1위에 그 아저씨를 뽑을 정도로 좋은 분이셨답니다. ^-^

역시나 길었던 오늘의 이야기도 여기서 줄입니다.
재밌게 보셨길 바라면서, 좋은 하루 보내세요~